은수저 없는 임원의 슬픔

▲ 대기업 임원은 샐러리맨들의 꿈이지만, 막상 되고 나면 실직자로 전락하는 것도 순식간이다.[사진=모그파일]
임원은 기업의 핵심인재다. 핵심인재는 극소수에게만 허용된다. 문이 좁다는 얘기다. 물론 혜택이 많다. 하지만 모든 게 좋은 건 아니다. 1년짜리 계약직이라서다. 언제 잘릴지 모른다.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지난해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한 김모씨를 통해 상위 1%인 대기업 임원의 허와 실을 살펴봤다.

김형일(가명)씨는 우리나라에서 다섯손가락에 꼽히는 대기업에 근무하다 지난해 말 퇴직했다. “아직 힘이 넘치는데, 해왔던 일을 못하게 돼 많이 아쉽다”고 말하는 그의 올해 나이는 쉰하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건 아니다. 직장생활에서 흔히 경험할 수 없는 전무(경영기획팀장) 자리까지 올라 억대 연봉도 받아봐서다. 아쉬운 건 해외 유학에서 석사까지 받고 들어간 직장을 고작 20년을 조금 넘긴 채 그만두게 됐다는 사실이다. 김씨는 나름 승진을 빨리 했다. 마흔다섯에 이사, 마흔여덟에 상무를 달았다. 전무에 오른 지 딱 1년 만에 계약기간을 연장하지 못하고 나오게 됐다. 그는 “사실 샐러리맨이라면 누구나 임원이 되길 꿈꾸지만, 막상 되고 나면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라며 “차라리 승진을 빨리 하지 않고 적당히 느긋하게 해서 부장을 달고 있었다면 아직 회사를 다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회상했다. 승진을 해서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남모를 고민이 많았고, 더구나 지금은 남들보다 더 일찍 퇴직하게 돼 오히려 손해가 됐다는 얘기다.

임원들은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집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너나 CEO의 입김이 제아무리 세다고 해도 모든 사업에 관여할 순 없다. 그들을 대신해 기업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건 임원들이다. 말하자면 임원은 기업의 ‘핵심인재’이자 기업의 ‘꽃’인 셈이다. 일반 직장인들이 회사에 입사해 “임원 자리 한번은 해봐야지”라며 꿈을 키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핵심자리에 쉽게 오를 리 없다. 더스쿠프가 국내 10대 그룹의 주력 계열사 10곳(삼성전자ㆍ현대중공업ㆍSK에너지ㆍLG전자ㆍ롯데쇼핑ㆍ현대중공업ㆍGS칼텍스ㆍ대한항공ㆍ한화ㆍ두산중공업)에서 현재 근무 중인 임원의 비중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임ㆍ직원수 약 29만5000명 중 4425명이 임원이었다. 임원 비중은 평균 1.15%다. 말 그대로 ‘상위 1%’인 셈이다. 

 
입사 후 임원이 되기까지 소요되는 기간도 꽤 길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올해 10월 발표한 ‘2014년 승진ㆍ승급관리 실태조사(219개 기업 대졸 신입사원 1000명 대상)’에 따르면 사무직 대졸 신입사원이 임원에 오르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 22.1년이었다. 2011년 조사에서 이 기간이 21.2년이었으니 임원 등용문은 더 좁아진 거다. 일반적인 남성의 경우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20대 중후반부터 50대 초반까지 직장생활을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퇴직 말년에나 한번 오를까 말까 한 자리가 바로 임원인 것이다. 그것도 평균적인 승진 자격이 될 때마다 누락되지 않고 코스를 밟아 올라갔을 때의 얘기다. 단 한번이라도 승진에서 누락된다면 임원 자리는 물 건너가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졸신입사원 1000명 중 임원으로 승진하는 비율은 0.74%로 고작 7명에 불과했다.

상위 1% 되기까지 평균 22년

그럼에도 그 좁은 문을 뚫고 들어가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임원이 되는 동시에 연봉이 2배 이상 오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연봉은 억대가 훌쩍 넘어간다. 게다가 기업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전용할 수 있는 고급승용차와 기사, 개인비서를 회사에서 제공한다. 해외 출장시에는 특급호텔, 비행기에서는 비즈니스석을 제공받는다. 또 별도의 공간을 사무실로 제공받는다. 그 외에도 임원에게만 주는 각종 선물 등 부수적인 혜택도 많다. 일부 핵심 임원은 퇴직 후에도 지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임원에 오른다고 해서 모든 게 다 좋아지는 건 아니다. 능력이 좋아 고속승진을 했던 김씨가 순식간에 실직자로 전락한 것처럼 언제나 쫓겨날 수 있어서다. 임원들은 사실 ‘파리 목숨’이다. 임원이 되면 일단 다니던 회사에서는 퇴직 처리되는 게 일반적이다. 퇴직금도 정산한다. 그 후 1년 단위로 근로계약을 하고 매년 갱신한다.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실수라도 저지르면 곧바로 짐을 싸야 한다. 정규직으로 입사했지만, 승진으로 임원이 되는 동시에 계약직으로 전락한다는 거다. 김씨가 “부장으로 계속 회사에 남아 있었다면…”하고 아쉬워한 건 이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임원이 ‘임시직원’의 준말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때문에 회사는 능력 없는 부장을 내쫓기 위한 수단으로 해당 부장을 임원으로 승진시키는 경우도 있다. 1년만 임원 대우를 해주면 부담없이 잘라낼 수 있어서다.

 
뿐만 아니다. 회사가 돈을 많이 주는 만큼 당연히 일은 더 많이 해야 한다. 김씨의 경우 이사가 된 후부터 기상시간이 5시, 출근시간은 6시 반이었다. 조찬회 강연을 들으러 가야 할 때는 미리 아침 업무를 챙겨야 해서 4시 전에 일어나야 했다. 그렇다고 퇴근을 일찍 하는 것도 아니었다. 

힘들게 올라도 ‘파리 목숨’

실적에 따라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만큼 일일이 업무를 검토하고, 사람을 만나러 다녀야 하다 보니 퇴근하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김씨는 “한동안 일ㆍ가정 양립이라는 말들을 많이 하던데, 사실 샐러리맨에서 출발한 대기업 임원에게 그런 얘기는 사치에 불과하다”고 토로했다.

기업의 핵심 요직이라 할 수 있는 임원 자리는 샐러리맨이면 누구나 오르고 싶어 하는 자리다. 하지만 쉽게 오를 수도 없고 오른다고 해도 장밋빛 미래만 펼쳐지지도 않는다. 더구나 올라가기가 힘든 것에 비해 내려오는 길은 너무 순식간이라 허망할 정도다. 김형일씨는 지금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새벽같이 나갔다가 밤늦게 퇴근하던 게 익숙해서 퇴직한 지금도 아침이면 무조건 집을 나온다. 자녀들과는 얼굴을 자주 못 봐 어색하기만 하고, 관리자로 오래 있다 보니 집에 있어봐야 잔소리꾼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갈 곳도 없다. 노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다. 무얼 위해 임원자리에 오르려 노력했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일하는 게 전부였는데, 일도 못하니까 답답할 따름이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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