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동구 마장축산물시장에 가보니…

앞에선 상생을 입에 담는다. 뒤에선 대형마트 의무휴업 규제가 ‘위법’이라며 소송을 제기한다. 이마트의 얘기다. 서울고법이 최근 ‘대형마트가 대형마트가 아니다’는 황당한 판결을 내려 논란이 일고 있다. ‘점원의 도움을 주는 곳은 대형마트가 아니라서 의무휴업 등 규제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게 서울고법의 논리다. 흥미롭게도 이 판결 논란은 이마트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 서울고등법원의 대형마트 의무휴업 규제 등의 위법 판단에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은 12월 22일 마장축산물시장.[사진=김미선 기자]
찬바람이 뼛속까지 얼릴 것 같던 12월 22일, 서울시 성동구에 위치한 마장축산물시장. 주름살이 깊게 파인 상인들이 물건을 팔고 있지만 한파 때문인지 손님이 별로 없다. 하지만 상인들의 마음을 얼리는 건 한파만이 아니다. 시장 복판에 자리를 잡은 ‘절망’이 더 무서운 존재다. 1998년 서울 성동구 마장축산물시장 일대엔 도시개발로 아파트와 초등학교가 들어섰고, 그 결과 35년간 운영되던 마장동 도축장이 문을 닫았다. 이때부터 마장축산시장에는 ‘퇴락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2003년 성동구청과 상인들이 힘을 모아 시장 천장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했지만 손님들은 발길을 다시 돌리지 않았다. 이 시장에 반전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건 2011년이다. 상인 조합원들이 힘을 합쳐 ‘고기익는마을’이라는 식당을 오픈한 게 퇴락물길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고기익는마을’은 시장에서 1인당 4000원에 고기를 직접 구워먹을 수 있는 일종의 정육식당이었다. ‘고기익는마을’에 손님이 몰리고, 이게 또 입소문으로 이어지자 시장엔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엔 더 큰 호재가 터졌다. 시장의 강력한 경쟁자(?) 대형마트의 규제가 발동했다. 월 2회 의무휴업, 영업시간 제한 규제(0시~8시) 등이었다. 1㎞ 반경에 이마트와 홈플러스가 있는 마장축산시장은 규제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상인들의 얼굴에는 ‘희망’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2014년 12월 12일 서울고등법원(서울고법)이 엉뚱한 판결을 내리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서울고법은 이마트ㆍ롯데쇼핑ㆍ홈플러스 등 6개 유통회사가 서울 동대문구와 성동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영업시간 제한 및 의무휴업일 지정 처분이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판단 근거는 이들 대형마트가 유통산업발전법에서 정의하는 대형마트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 참고: 유통산업발전법은 대형마트란 ‘점원의 도움 없이 소비자에게 소매하는 점포의 집단’으로 정의돼 있다. 이 지역 6개 유통회사는 점원이 도움을 주기 때문에 대형마트가 아니라는 게 서울고법의 주장이다.]

대형마트 소송에 상인들 한숨만

공교롭게도 마장축산물시장은 서울고법 판결에서 패소한 성동구ㆍ동대문구와 인접해 있다. 서울고법 판결로 부활의 날개를 펴고 있는 홈플러스(동대문점)과 이마트(왕십리점)가 인근에 있다. 12월 12일 찾은 시장 상인들의 얼굴이 유독 어두운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한 상인은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이면 같은 일요일이라도 손님이 훨씬 많이 온다”며 “조금씩 나아진다 싶었는데 의무휴업이 없어질 수 있다니 기운이 쭉 빠진다”고 말했다. 상인들의 마음을 더 차갑게 얼리고 있는 건 대형마트의 ‘두 얼굴’이다.

앞에선 상생을 부르짖던 이들이 뒤에선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의무휴업 폐지’ 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 시장에 30년간 몸담고 있는 이민형 마장축산물시장 상점가진흥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이마트가 올여름 1만장 정도의 디자인 봉투를 건넸다”며 “그때만 해도 노력하는구나 싶었는데 뒤로는 대형마트 규제가 위법이라고 외치고 있으니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마트는 상생에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해왔다.

이마트의 신세계그룹은 7월 16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함께 ‘전통시장ㆍ소상공인 공감ㆍ동행ㆍ상생 협약’을 체결했다. 신세계그룹은 지역상권 활성화와 전통시장의 발전을 위해 5년간 100억원의 지원을 약속했다. 여기에는 전통시장에 연간 500만장의 새 비닐봉투를 전국 각지 전통시장에 무료 배포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마장축산물시장에 약 1만장 비닐봉투가 전달된 이유다.  최근엔 SSM(기업형슈퍼마켓)인 이마트 에브리데이 점포에 야채ㆍ과일ㆍ수산물을 빼고 전통시장과 상생하겠다며 상생스토어를 오픈하기도 했다.

▲ 신세계그룹은 올 7월 협약식을 통해 전통시장, 소상공인과의 상생을 약속했다.[사진=뉴시스]
그런데 이마트의 상생을 찬찬히 뜯어보면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이마트는 2014년 7월 17일 편의점 ‘위드미’ 관련 사업설명회를 열고 연말까지 전국에 1000개 점포를 신규 출점하겠다고 밝혔다. 전통시장ㆍ소상공인과의 상생 협약을 체결한 바로 다음날 편의점으로 ‘골목시장 초토화’를 공언한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신세계그룹은 복합쇼핑몰 오픈을 줄줄이 앞두고 있다. 2016년에 동대구 복합환승센터와 하남 유니온스퀘어 두개 복합쇼핑몰을 오픈할 계획이다.

고양시 삼송ㆍ인천 청라ㆍ경기도 안성에도 복합쇼핑몰 건립을 진행 중이다. 이런 복합쇼핑몰은 시장상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유통채널 중 하나다. 피해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배재홍 전국유통상인연합회 사무국장은 “대형마트보다 10배 정도 규모가 큰 복합쇼핑몰을 오픈하면 전통시장을 비롯해 주변 상권은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 것”이라며 “이렇게 건립된 복합쇼핑몰에는 이마트가 들어설 게 뻔하다”고 밝혔다. 그는 “그런데도 고작 월 2회 의무휴업 같은 규제로 문제 삼고 있다”고 꼬집었다.

상생 플레이에 숨은 독식전략

이마트 관계자는 “이번 의무휴업 위반 소송건은 이마트뿐만 아니라 업계 전체의 문제”라며 “이마트만의 문제로만 보기 어렵다”고 해명했다. 그는 “앞으로도 의무휴업이나 영업환경과 관련한 부분은 전적으로 규제에 따를 것”이라며 “상생과 관련해서 앞으로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대형마트 유통규제 논란의 공은 이제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성동구청은 대형마트 영업규제가 위법이라는 서울고법 판결에 상고를 결정했다.

대법원이 서울고법 판결을 인정하면 전통상인은 벼랑 끝에 몰릴지 모른다. 전통시장 현대화 사업 등에 쏟아 부은 그간의 정성도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한 상인의 얘기다. “돈을 달라는 것도, 무엇을 해 달라는 것도 아니다. 다 같이 힘드니 주말에만 손님을 조금 나눠 갖자는 거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인가.” 그날 따라 시장엔 한기가 가득했다. 상인들의 눈물이 얼음계곡을 만들 것 같았다.
김미선 더스쿠프 기자 story@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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