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 환기구 사고 後

지난해 10월 판교 환기구가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순식간에 많은 이가 올라간 게 화근이었다. 하지만 애초 사람이 올라갈 수 없도록 ‘안전펜스’를 쳤다면 사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거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사고 발생 후 3개월, 서울시내 환기구엔 안전조치가 취해졌을까. 더 스쿠프가 지하철 환승역의 환기구 15곳을 살펴봤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 서울시가 대대적인 환기구 점검을 실시했지만 달라진 점을 찾기는 어렵다. 사진은 시청역 1번 출구 앞 환기구 모습.[사진=뉴시스]
지난해 10월 성남 판교테크노밸리 야외광장에서 열린 행사의 ‘축하 공연’ 도중 큰 사고가 일어났다. 공연장 맞은편 건물의 환기구 위에서 공연을 보던 사람들이 20m 아래로 추락해 2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거였다. 환기구 덮개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탓이었다. 지하철역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환기구의 위험성이 드러나면서 그 부실한 관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일부 언론은 일본의 사례를 들며 우리나라 환기구 설치 상태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일본의 환기구는 조형물 형태로 만들어 사람이 아예 올라갈 수 없다. 지면형 환기구라도 가로수와 화단 사이에 설치해 보행자의 동선과 겹치지 않도록 했다. 자연스럽게 환기구를 피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서울시내에는 총 1만8862개의 환기구가 있다. 이 가운데 10.84%인 2045개의 환기구가 보도 위에 설치돼 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사람들이 별 어려움 없이 올라갈 수 있는 높이거나 30㎝ 미만으로 사람들이 그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는 지면형이다. 사람들이 지나는 인도를 반 이상 차지한 환기구도 있고, 그 위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는 시민도 흔히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상시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얘기다. 안전을 위한 조치가 시급해 보인다.

▲ 판교 환기구 사고가 발생하자 서울시는 즉각 서울시내 환기구 점검에 나섰다[사진=뉴시스]
그렇다면 판교 환기구 사고 이후 어떤 조치가 있었을까.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11월 ‘환기구 설계ㆍ시공ㆍ유지관리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앞으로 설치되는 환기구의 경우 대지와 도로 등 경계로부터 2m 이상 떨어져야 하며 높이는 최소 2m 이상으로 설치 돼야 한다는 게 골자다. 서울시도 즉각 조치에 나섰다. 하지만 더스쿠프가 1월 12~13일 서울시내 지하철 환승역 15곳의 환기구 상태를 조사해 본 결과, 안전펜스가 쳐진 곳은 단 1군데도 없었다. 안전펜스는 고사하고 ‘위험하니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문조차 없는 곳은 15곳 중 12곳에 달했다.

환기구에 제품상자나 쓰레기가 방치돼 있는 곳도 있었다. 주변에 철물점, 조명기구 상가가 즐비한 을지로4가역 10번 출구 주변 환기구 위엔 박스가 잔뜩 쌓여 있었다. 서울시청 건너편 지하도상가 출구(스타시티몰 지하상가 4번 출구) 바로 앞 환기구 위에는 안전펜스나 경고문구 대신 온갖 쓰레기가 방치돼 있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환기구 점검 결과, 상태가 전반적으로 양호했다”며 “구조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긴급한 위험 사항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환기구 점검 이후 무엇이 달라졌나

실제로 서울시는 지난해 10월 23일~11월 17일 총 1만8862개의 환기시설을 점검했다. 그 결과, 지하철을 포함한 공공기반시설 부속 환기구 2809개 중 25.7%인 721개에서 지적사항이 나왔다. 일반건축물 환기구 1만6053개 중에선 3.7%에 해당하는 597개가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지적사항이 나온 환기구의 경우에도 구조적인 안전문제는 없었다”는 게 서울시의 입장이다. 현 시설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위험이 있는 환기구에 펜스를 치는 건 최소한의 조치가 아니냐’고 질문하자 서울시 관계자는 “통행로 상에 있거나 사람이 올라갈 우려가 있는 환기구에 대해선 덮개의 하부에 철재 빔과 같은 지지대를 추가로 설치하는 등 이중의 안전장치를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며 “올 상반기 중 이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환기구 관리 예산 30억원을 편성해 의회에 제출했다.

사고가 발생한 지 두달이 훌쩍 지났는데, 안전점검 결과만 믿고 후속조치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얘기다. 사고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판교 사고도 공연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예외적인 상황이 생기면서 발생했다.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데 일반적인 상황에서 안전하다는 점검결과만 믿고 안심할 수 있을까.
최범규 더스쿠프 기자 cb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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