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㊾

선조는 평양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또다시 저버리려 했다. 유성룡은 그러면 절대 안 된다며 말렸다. 신의를 버린 임금을 누가 믿겠느냐는 논리에서였다. 유성룡의 간청에 함경도 피출설은 조정에서 조금씩 힘을 잃었다. 그러자 서인들이 유성룡의 주장에 반론을 들기 시작했다.
 

 

대동강 남안에는 소서행장의 군대가 온 지가 벌써 사흘째였다. 유성룡ㆍ윤두수ㆍ이원익ㆍ김명원 등이 연광정에서 건너다본즉 적병 하나가 글 쓴 종이를 창대에 매어 강변 모래판에 꽂아놓고 손짓을 하였다. 유성룡이 그것을 보고 무슨 서신이리라 생각하여 군사를 시켜 소선을 타고 가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겉봉에는 ‘상 조선국 예조판서 이덕형각하上 朝鮮國 禮曹判書 李德馨閣下’라고 써있었다.  소서행장이 보낸 편지였다. 소서행장은 꾀를 부려 조선을 농락할 계략을 수차례 써왔다.

자신이 야소교耶蘇敎(예수교의 음역어)를 신봉해 세계적 지식과 평화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선전하는 한편 자신의 일파는 처음부터 풍신수길의 조선정벌을 반대했다고 알렸다. 전쟁이 난 뒤에도 항상 화의를 제안하는 척하며 조선의 서인 일파를 농락했다. 더구나 그는 평조신으로 여러번 한성에 와서 가선대부(종2품 하下의 품계)까지 봉직했던 터라 조선 사람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그럼 소서행장이 조선 정부의 예조판서 이덕형에게 보낸 서간을 참고해 보자.

再啓 昨日에 呈愚書하여 以陳講和之事러니 貴國이 不信之는 亦宜哉리라. 吾軍이 經萬里風波之艱과 關山之險하고 直入漢陽이어늘 今也에 無故而欲講和하니 貴國이 不信之는 亦宜哉로다 臣이 爲貴國解之하리이다. 吾殿下[指秀吉] 欲假途而擊大明하니 雖吾諸將이 奉命來于此나 不欲自此로 又經數千里하여 入大明이니 是故로 先與貴國으로 結和하고 而後 借貴國一言하여 以講和於大明也라. 貴國도 亦以一言으로 使大明으로 講和於日本則 三國이 皆安하리니 良策이 莫良焉하리이다.

吾諸將은 免勞役하고 萬民은 蘇甦하리니 是吾諸將之議也라. 吾殿下도 亦不欲與貴國으로 絶交나 然이나 貴國이 失隣好之道하여 拒吾軍故로 吾亦動干戈而已라. 臣이 虛受貴國大職하니 豈忘鴻恩乎이까. 奉國命以先諸將은 固不獲止也로소이다. 今夜에 傾盡肝膽하여 陳縷縷하오니 足下는 察之하소서. 尙不信之라도 則是亦可也라. 傳義智行長兩人一紙之書하노이다. 自愛不宣 朝鮮國 禮曹判書 李德馨閣下. 다시 드립니다. 전날 글을 올려 화해하자는 일을 말씀드렸는데 귀국이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군대가 만리풍파의 어려움과 관산(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변방)의 험함을 가벼이 여기고 바로 한양으로 들어갔거늘 지금 까닭 없이 강화를 하고자 하니 귀국이 그를 믿지 않는 것은 마땅합니다. 신이 귀국을 위하여 그것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우리 전하(풍신수길)께서는 길을 빌려 대명을 치고자 함에 비록 모든 장수들이 명령을 받들어 여기까지 왔지만 이로부터 또한 수천리를 지나야 명에 들어가니 먼저 귀국과 화친을 이루고 그다음 귀국의 한 말씀을 빌려 대명에 화의를 청하려 합니다.
 

 

귀국이 대명으로 하여금 일본 측에 화의를 청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3국이 모두 평안하리니 이보다 더 좋은 방책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장수들은 노역을 면하고 만백성은 소생하리니 이는 우리 장수들의 의견입니다. 우리 전하도 귀국과 절교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국이 이웃나라와의 국교의 도리를 잃어 우리 군사를 막는다면 우리 또한 군대를 움직일 것입니다. 신이 귀국의 높은 직위를 허심탄회하게 받았으니 어찌 높고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나라의 명을 받들어 장수들의 앞장을 서게 됨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솔직한 심정을 다하여 누누이 말하오니 족하(이덕형)께서는 이를 살피소서. 아직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또한 괜찮으니 이 편지의 내용을 전해주십시오. 불선합니다. 조선국 예조판서 이덕형 각하. 이처럼 소서행장은 교활한 인간이었다. 그가 이 편지를 보낸 건 임진강을 건널 배를 얻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유성룡은 이덕형을 배에 태워 보내 소서행장 측 사람들과 만나게 했다. 이른바 ‘강중江中회담’이었다.
 
물론 유성룡의 전략은 적병이 무엇을 주장하든 적의 공격을 하루라도 연기시키는 거였다. 다시 말해 중국의 구원병이 오는 시간을 벌자는 취지였다. 반면 소서행장은 강을 건너올 방법을 얻고자 했을 거다.  조선은 배를 보내 소서행장 측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 조선 쪽에선 이덕형이 나갔다. 소서행장 측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두 나라가 무기로 대적하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오. 일본의 본의는 귀국의 길을 빌려 중국에 조공하려는 것밖에 없는데 귀국이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일이 여기까지 이른 것이오. 지금이라도 귀국이 중원에 조공할 길만 빌려 준다면 양국이 무사할 것이오.”

이덕형이 답했다. “대명황제에게 조공을 청하려면 공손히 할 길이 있을 터인데 왜 명분 없는 군대를 끌고 나와 이웃나라를 침범하오? 만일에 성심으로 대명에 조공할 길을 통하기를 원하거든 곧 퇴병하고 다시 오시오.” 서소행장 측이 말하되 “귀국에서 일본의 청을 들어 중원에 가는 길을 빌려 준다면 곧 군을 거두겠으나 그 허락을 받기 전에는 군사를 거둘 수 없소”라고 했다. 두 편은 자기네 의견을 고집, 타협점을 발견할 길이 없었다.
 

 

강화회담 결렬에 바빠진 조선

소서행장 측은 흥분해 이렇게 쏘아붙였다. “일본의 30만 대군이 뒤를 이어 쳐들어오고 또 10만여의 수군이 조선 서해에서 평안도로 올 것이오. 그리 되는 날이면 용서가 없을 것이오. 조선 국왕을 사로잡아 항서를 쓰게 하는 자리에서 대감도 다시 만납시다!” 이덕형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며 “이제 며칠이 지나면 명병 100만이 육로를 통해 올 터이고 또 수군명장 이순신이 경상도 해안에서 10만이라 칭하는 일본수군을 연전연승하여 섬멸하였거든 귀하는 후회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라고 답했다.

이렇게 대동강 상의 강화담판은 파열이 되고 말았다(1592년 6월 9일). 대동강의 강화담판이 결렬된 직후 이덕형은 중국으로 떠났다. 하루빨리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덕형은 이항복에게 이렇게 한탄했다. “빠른 말이 없어 북경北京으로 속히 갈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대표 cvo@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