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㊿

평양에 남은 수성대장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체찰사 유성룡,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은 장수와 무관한 인사들이었다. 비록 무관을 의미하는 원수, 대장 등으로 불렸지만 기실은 풍월구나 글줄이나 짓는 선비에 불과했다. 조선이 일본군에 연전연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전략과 전술을 알 리 없었기 때문이다.


대동강 강화담판이 결렬된 직후 이덕형은 중국으로 떠났다. 하루빨리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여의치 않았다. 이덕형은 이항복에게 이렇게 한탄했다. “빠른 말이 없어 북경으로 속히 갈 수 없다.”
이항복은 자기가 타는 준마를 주며 “만일에 명나라의 원병이 안 나오면 우리나라는 어쩔 수 없는 형편이라 망하고 말 것이니 그대는 나를 다시 볼 수는 없으리라”고 오열하며 작별을 했다. 이덕형은 이렇게 답하며 눈물을 뿌렸다. “명병明兵이 출동하지 않으면 나는 노룡盧龍(중국 북경 근처 만리장성 북변의 지명)의 언덕에 해골이 될 것이요, 다시는 압록수를 건너오지 않으리라.”

북경에 들어간 이덕형은 명 황제에게 6차례나 구원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때마침 들어온 청병사請兵使 정곤수鄭崑壽도 조선이 위급존망하다는 사정을 간곡히 애원하며 알렸다. 명나라 조정은 마침내 5만 병마를 조선에 보내기로 했다. 송응창宋應昌, 이여송李如松의 무리가 선봉에 섰다. 당시 일본군은 평양성 총공격을 결행하려 하고 있었다. 적군 수천명이 대동강 동쪽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위엄을 보였다. 조선의 대신들은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6월 11일 선조는 영의정 최흥원, 우의정 유홍, 전임대신 정철의 무리를 데리고 소리도 없이 칠성문을 빠져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두렵기도 하거니와 백성을 대할 낯도 없었다. 대관들 중에선 정철과 유홍 두 재상이 일본군을 가장 두려워했다. 선조의 일행은 철옹성이라고 일컫는 영변으로 향했다. 선조가 떠날 때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전임이조판서 이원익 등에게 평양성을 지키게 했다. 도체찰사 유성룡에게는 평양에서 명나라 구원군을 마중하라고 영令을 하달했다.

▲ 선조는 대동강 전선을 사실상 유성룡에게 맡겼지만 그 역시 뾰족한 답은 없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수성대장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체찰사 유성룡,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이 연광정에 모였다. 하지만 그들은 구경꾼들 같았다. 무관을 의미하는 원수, 대장 등으로 불렸지만 기실은 풍월구나 글줄이나 짓는 선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말달리기와 활쏘기가 무엇인지, 검술과 창법이 무엇인지, 기습과 정공이 무엇인지, 나아가고 머무름이며 전승 방략이 무엇인지를 알 턱이 없었다. 무관에게 병권을 주기 싫어 체찰사니 도원수니 하는 요직을 가지고 있었던 거였다.

병권 쥔 오합지졸 문관들

유성룡은 윤두수에게 “수성守城 준비가 어떻게 됐소”라고 물었다. 이름만 대장일 뿐 군정은 철저하지 못한 윤두수가 대답을 망설이자 평양성 수비의 사실상 책임자 김명원이 입을 열었다. “파수할 설비라야 별것 있소? 본도감사 송언신에겐 대동문(평양성의 동문), 안주安州병사 이윤덕李潤德에겐 부벽루浮碧樓 위쪽의 여울목, 자산慈山군수 윤유후尹裕後에겐 장경문長慶門, 성중 사졸들에겐 성첩城堞을 지키게 했습니다. 성중 사졸은 4000~5000명 됩니다.”

유성룡은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그러면 4000~5000명의 사졸은 어떻게 분배해 수비하게 하였소?” 말문이 막힌 김명원은 한참이나 끙끙거리다가 “대오를 짜서 성을 순회하면서 지키라고 했소”라고 답했다. 실제로 성 위의 어떤 곳에는 100여명이 한데 뭉쳐 있고 어떤 곳에는 2~3명씩 따로 떨어져 있었다. 또한 일부는 앉고 일부는 서 있어, 군율이 불철저했다.

심지어 을밀대乙密臺 부근에 소나무 가지에는 저고리나 바지가 걸려 있어 마치 빨래터를 방불케 했다. 유성룡이 “저것 다 무엇이오”라고 묻자 김명원은 웃으며 답했다. “대감 모르시오? 그것이 의병(적을 속이기 위해 군사가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민 술책)이란 것이오.” 유성룡은 병법에 가장 소양이 있다는 재상이다. 역시 웃으며 “저걸 보고 누가 의병으로 안단 말이오? 어떤 것은 너무 높이 걸려서 구름 보이듯 하오” 하였다. 윤두수도 웃었다. 일좌가 다 웃어버렸다. 김명원은 무안했는지 종사관을 돌아보며 “여보게, 어떻게 시켰기에 옷을 저 모양으로 걸어 놓는단 말인가”라고 책망했다.

이때 대동강 저쪽 동대원東大院 언덕 위에는 적병이 일자로 진을 치고 장검을 비껴들었는데 번개와 같이 번쩍거렸다. 또한 적병 6~7명이 조총을 들고 성을 향해 일제히 쏘는데 그 소리가 웅장하여 처음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철환이 강을 건너거나 성을 넘어 대동관 객사 지붕 기왓장 위에 떨어졌다. 일부 철환은 성루 기둥을 맞혔다.

 
유성룡은 분연히 “우리도 응전을 해야 되지!”라며 군관 강사익姜士益으로 하여금 방패에 몸을 은신하고 편전을 쏘게 하였다. 강사익의 화살이 날아서 적진 한가운데 떨어져 모래판에 박히니 적병이 이것을 보고 두려워 물러갔다. 그제야 도원수 김명원이 활 잘 쏘는 무사 수십명을 배에 태워 강중江中으로 보낸 뒤 활을 쏘게 했다. 어떤 병사는 배를 저어 강 저쪽에 있는 적진으로 침투하니, 적병이 겁을 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적병이 가진 조총의 위력 때문이었다. 믿는 것은 대동강이 깊어져 적군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는 건데, 최근 들어 가물어 강물이 줄어들고 있었다.

선조, 백성 모르게 몽진 결행

그래서 윤두수는 감사 송언신을 시켜 단군묘檀君廟, 기자릉箕子陵, 동명왕東明王祠 사당에서 기우제를 지냈지만 비는 오지 않았고, 강물은 줄어만 갔다. 또한 능라도綾羅島 이하는 물이 깊어도 위쪽은 옅은 여울목이 많아서 길만 알면 건너올 수가 있었다. 적병이 아직까지는 길을 찾지 못했지만 하루 이틀만 지나면 알아낼 공산이 컸다. 그러면 평양성을 지키는 게 어려웠을 것이다.

유성룡은 윤두수를 돌아다보며 “대감, 어찌 하자고 저 각처의 여울목을 각별히 지키지 아니하오? 여울목은 엄히 지켜야 하지 않겠소?”라고 재촉했다. 유성룡은 또 “안주병사 이윤덕의 재국으로는 믿을 형편이 못되오”라고 언성을 높였다. 순찰사 이원익을 돌아보고는 “여보, 대감이 좀 가서 같이 지키시오”라고 했다. 이원익은 이렇게 답했다. “가서 지키라고 하시면 소인이 아니 갈 리가 있소?” 윤두수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 대감이 가서 보시오 그려.” 그래서 이원익은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능라도 위쪽의 여러 여울목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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