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양적완화 ‘그렉시트’ 벽에 막히나
유럽 양적완화 ‘그렉시트’ 벽에 막히나
  • 강서구 기자
  • 호수 128
  • 승인 2015.02.04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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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기 막아선 변수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전면적인 양적완화 조치를 시행했다. 유동성을 공급해 침체에 빠진 유로존의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이다. 양적완화의 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게다가 급진좌파가 집권한 그리스가 부채탕감을 요구하고 있어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유로존의 경제회복은 여전히 쉽지 않은 상황이다.

▲ 부채문제를 둘러싼 그리스와 유로존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사진=뉴시스]

“나를 믿어라, 조치는 충분할 것이다.” 유로존 위기가 갈수록 깊어지던 2012년 7월,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이렇게 공언했다. 하지만 드라기는 이 공언을 지키지 못했다. 그로부터 3년 동안 유럽을 구할만한 특별한 조치는 없었다. 이탈리아 재무장관 시절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이탈리아를 구한 대가로 얻은 ‘수퍼마리오’라는 별명이 무색할 지경이었다.그런 드라기가 드디어 카드를 꺼내들었다. 본격적인 유로존 경기 부양에 나선 것이다. 무기는 ‘양적완화’다. ECB는 오는 3월부터 매월 600억 유로(약 73조9500억원) 총 1조1400억 유로 규모의 채권을 내년 9월까지 매입하겠다고 밝혔다. 국제금융시장의 눈이 ‘드라기의 선택’에 쏠리고 있지만 성공 여부를 장담하긴 어렵다. 그만큼 이 카드를 뽑을 때까지의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시계추를 2012년으로 돌려보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2011년 유럽재정위기가 터졌다. 가뜩이나 시름시름 앓던 글로벌 경제는 ‘죽음의 바다’를 향해 더욱 빠르게 돌진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나라가 침체기에 돌입했다는 거다. ‘경제대국’을 자부하던 미국은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마저 찾지 못하고 있었다. 유로존은 남유럽에서 시작된 재정위기에 물들어 앓고 있었다. 이런 절망적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건 2012년 9월 13일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연준ㆍFed) 의장이 3차 양적완화를 발표한 이후다.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칭처럼 헬리콥터에 올라탄 버냉키는 ‘돈’을 풀기로 결심했고 ‘무제한’ ‘무기한’이라는 단서조항을 달았다. 시장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한방을 날린 셈이었다.
 
승부수는 통했다. 2009년 10월 10%대로 치솟았던 미국의 실업률은 2014년 말 절반 수준인 5%대로 뚝 떨어졌다. 2%에 머물러 있던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3분기 5%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11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주가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 비해 100% 이상 상승했다. 또한 주택시장을 비롯한 각종 경제지표도 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로존ㆍ중국ㆍ일본 등이 여전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홀로 글로벌 경제를 이끌고 있다. 버냉키의 카드가 ‘신神의 한수’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침체의 늪’ 벗어나지 못한 유로존

버냉키가 양적완화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2012년 8월 드라기 총재도 경기회복을 위한 통화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시행되지 못했다. 유로존 경제대국 독일의 반대가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당시 ECB의 최대 역할은 물가안정이라고 못박으며 재정위기국의 국채를 사들이는 등의 행위는 명백한 월권이라고 압박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곡물가격 인상에 따른 애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ECB는 재정위기국의 국채 매입, 초저리장기대출프로그램(LTRO) 등 통화정책을 사용하기 어려운 지경에 몰렸다.

▲ 유로존이 매월 600억 유로의 국채를 매입하는 양적완화 시행에 나섰다.[사진=뉴시스]
물론 ECB가 경기회복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건 아니다. ECB는 2014년 6월 통화정책회의를 통해 기준금리를 0.25%에서 0.15%로 낮추고 초단기 수신금리인 ECB의 예금금리를 제로에서 마이너스 0.1%로 떨어뜨렸다. 9월엔 기준금리를 0.15%로 인하한 지 3개월 만에 다시 0.05%로 낮추고, 예금금리는 마이너스 0.20%로 떨어뜨렸다. 비非전통적 통화정책 사용도 결정했다. 목표 장기대출 프로그램(TLTRO)을 실시해 826억 유로의 유동성을 시중은행에 공급했다.

그럼에도 유로존 경제는 요지부동이다. 국채 매입과 같은 강력한 양적완화 정책이 없는 부양책은 유동성 부족현상을 완화시키지 못했다. 기준금리인하 등 소극적 양적완화대책이 실물경제를 부활시키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ECB는 TLTRO를 통해 최대 4000억 유로의 유동성이 공급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절반 수준인 2124억 유로에 그쳤다.

하지만 ECB의 이번 양적완화대책은 다른 결과를 끌어낼 공산이 크다. 드라기 총재가 유로존의 경기부진에 마침표를 찍고, 금융시장의 불안을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어서다. 물가를 2%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플랜을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드라기는 양적완화의 기간을 얘기하면서 ‘최소한’이란 단어를 언급했다. 소비자물가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추가 유동성 공급 조치가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유로존의 물가상승률은 22개월 연속 목표치인 2%를 밑돌고 있다. 지난해 12월 독일의 물가상승률은 5년 만에 최저치인 0.2%를 찍었고, 유로존 물가도 시장의 예상치를 밑도는 0.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물론 이를 두고 유로존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졌다고 판단하긴 어렵다. 문제는 물가상승률 하락이 실질임금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유로존 대부분의 회원국은 ‘임금 슬라이드 제도(Sliding scale plan)’를 택하고 있다. 임금상승률과 물가상승률을 연동한 이 제도는 인플레이션시 실질임금 하락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때는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 지금처럼 실업률이 높은 상태에서 저유가 국면이 지속되면 실질임금이 줄어들 공산이 크다는 거다. 실질임금 하락은 소비와 투자 위축으로 연결된다. 유로존이 디플레이션 압력이 확대되는 일본식 장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유로존 양적완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각 회원국이 ECB에 출자한 자본금 비율에 따라 채권을 매입한다. 매입 대상은 2년~30년 만기 유로존 회원국의 국채와 기관(대형기관ㆍ국제기관)이 발생한 채권이다. 회사채는 대상에서 제외했다.

국채 매입의 주체가 각국의 중앙은행이라는 얘기다. 손실부담은 전체 자산매입의 80%는 각 회원국이 부담하고 20%는 공동으로 부담한다. 공동부담 20% 가운데 8%는 ECB가 부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유로존 각국이 채권을 매입했을 때 입을 수 있는 최대 손실 공유대상은 전체의 12%다. 이는 손실공유에 반대하고 있는 독일을 비롯한 일부 국가의 의견을 반영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유로존의 양적완화로 유동성은 증가할 전망이다. ECB의 총자산이 2조2000억 유로에서 3조3000억 유로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국제금융시장이 꿈틀대고 있다. 유로존의 양적완화 시행이 알려진 직후 한국을 비롯한 글로벌 증시는 일제히 상승했다.

3년 만에 약속 지킨 드라기

미국과 유럽의 증시가 1%대의 상승세를 기록했다. 조병현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유로존의 양적완화는 ECB가 본격적인 대응을 하겠다는 것으로 투자자의 기대 심리를 자극할 수 있다”며 “게다가 금융시장에 유동성이 공급되면 글로벌 금융시장 리스크 지표들이 하락할 공산도 크다”고 전했다. 그러나 유로존의 양적완화 조치가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무엇보다 양적완화 조치의 가장 큰 부양 효과인 금리하락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유로존 주요국의 장기 금리가 이미 매우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서다.

정부를 중심으로 돈을 푼 미국과 달리 유로존 양적완화는 은행 중심의 차입구조를 띠고 있다는 것도 약점이다. 민간은행이 대출 확대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경우 양적완화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재만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ECB의 전면적인 양적완화 조치가 유로존의 경기회복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유로존 민간은행의 가계ㆍ기업 대출 확대가 먼저 확인돼야 한다”며 “유로존 민간은행의 기업 대출이 늘어나 경기회복에 기여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밝혔다.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함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도 부정적인 요인이다.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함께 시행해야 거시경제지표의 개선을 기대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유로존은 여전히 재정정책에 관한 타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재정 취약국의 구조개혁 강도를 높이는 것과 재정확대 정책 사이의 정치적 타결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윤창용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독일의 주장대로 유로존 재정 취약국이 재정긴축과 임금 구조조정 등의 구조개혁을 강도 높게 시행하든지 아니면 독일이 한발짝 물러서 재정확대를 도모할 것인지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며 “재정정책 방향에서 대타협을 이루지 못한다면 ECB의 양적완화는 시간을 벌어줄 도구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그렉시트(그리스 유로존 탈퇴)’를 향한 시장의 우려도 여전히 유로존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그리스는 급진좌파연합인 ‘시리자’가 이번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다행히 시장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는 없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리스 국민의 75%에 유로존 탈퇴를 반대하고 있고, 시리자도 유로존에서 탈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윤지호 이트레이드증권 센터장은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할 경우 국가부도 사태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시리자가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여당이 된 상황에서 이전처럼 강경한 반응은 보이기 힘들 것” 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EUㆍECBㆍ IMF ‘트로이카’와 그리스의 부채탕감ㆍ재정긴축 완화 협상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시리자가 부채탕감을 요구하고 있지만 유로존은 그리스 새 정부의 부채 전액상환을 촉구하고 있어서다.은성민 메리츠종금증권 센터장은 “그리스와 트로이카의 부채 재협상 과정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며 “독일이 그리스의 믿을 만한 구조개혁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리스는 긴축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정치적 문제로 번진 ‘그렉시트’

특히 독일이 그리스의 부채탕감을 용인할 공산은 거의 없다. 그리스의 부채를 탕감해 줄 경우 다른 PIGS(포르투갈ㆍ이탈리아ㆍ그리스ㆍ스페인) 국가들도 부채탕감을 요구하고 나설 공산이 커서다. 김영준 교보증권 센터장은 “독일이 부채탕감은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히고 있는 만큼 부채 재협상은 만기연장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며 “추가 부채탕감은 다른 재정 취약 국가에게 나쁜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적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채무국인 그리스와 채권국을 대표하는 독일 사이의 충돌은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게다가 독일 내에서 그리스에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면서 그렉시트를 대비해야 한다는 강경론까지 등장했다. 박연채 키움증권 센터장은 “그리스와 독일의 기氣싸움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며 “그리스와 독일의 대립이 경제가 아닌 정치적인 상황으로 번지고 있어 상황을 섣불리 예상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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