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55)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이 패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일본군은 전함대의 세력으로 전라·충청·경기·황해의 연해를 차례로 점령한 뒤 조선의 제해권을 장악했을 것이다. 유일한 조선 땅이던 전라도마저 적의 수중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평양에 있는 소서행장, 종의지 등 제장은 수군 10만과 합세해 평양 이북으로 출병했을 게 분명하다.

▲ 이순신은 학익진 전법으로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순신이 견내량으로 보낸 6척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한척도 상실하지 않고 쫓겨 온다. 은은한 포성이 들리는 것을 보니, 싸우며 달아나고 있는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 병선들의 뒤를 따라 일본 군함들이 검은 돛을 달고 기러기 떼 모양으로 콩 볶듯 조총을 난사하며 쫓아오고 있다. 이를 확인한 순신은 손수 북을 울렸다. 한산도 속 바다에 숨어 있던 이순신의 직계 주력함대에 출동을 명하는 암호였다.

한산도 바다에 매복하고 기다리던 주력 함대 50여척은 대장선의 북소리를 듣고 일제히 내닫는다. 어영담 등 선봉대가 죽도 앞 큰 바다에 도착했을 때 뒤쫓아온 적의 층각대선은 36척, 중선은 24척, 소선은 13척으로 도합 73척에 달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후군後軍으로 40여척이 뒤쫓아오고 있었다.

순신이 다시 북을 울렸다. 그러자 판옥대맹선 25척, 중선 15척, 소선 10척 등 50척의 이순신주력부대가 물속에서 솟아오른 듯 나선다. 화도(경남 거제시 소속으로 현재 명칭도 화도) 뒤에 숨어 있던 이억기와 원균의 병선도 좌우로 갈라 나와 후로를 막았다. 승승장구하듯 몰려오던 적의 함대는 의외로 큰 함대가 앞뒤를 막자 그 행렬이 어지러워졌다.

조선 함대는 학익鶴翼의 진세를 벌여 적의 함대를 안아 쌌다. 그리곤 풍우를 치듯 지·현자 대포와 승자대포의 무기를 난사하였다. 선봉으로 오던 적선 3척이 대포에 맞아 깨졌다. 배에 탔던 적병은 모두 물에 빠져 깨진 널조각을 붙들고 부르짖었다. 이 모습을 본 다른 적선들은 예기가 꺾였다. 뱃머리를 돌려 오던 길로 도망가려 하자 이번엔 난데없이 병선 5~6척이 고성 두룡포(경남 통영시 중앙동 앞바다) 쪽에서 내닫는다. 순천부사 권준의 병선이었다. 중위장 권준은 각양 대포와 화전을 맹렬히 쏘아댔다. 그 결과, 적의 층각선 한척을 깨뜨리고 적장 이하 10여급을 베었다. 견디지 못한 적선은 거제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망을 쳤다.

순신의 계략에 속은 적군

▲ 조선은 한산도 대첩의 승리로 조선 전토의 재해권을 되찾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런데 이번에도 복병선 10여척이 풍우치듯 내닫는다. 송희립, 가안책 등이 탄 순신의 별동대였다. 이들은 서까래 같은 크기의 화전과 각종 천지현자대포, 장편전, 유엽전을 퍼부어 쏘았다. 적도 사력을 다해 응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면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채 집중포화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때는 황혼이 되어간다. 적선 70여척은 불타고 깨졌으며 남은 배는 틈을 타 도망치려 했지만 미륵도彌勒島와 한산도의 사이 넓은 바다를 가로막은 수천 수만의 낙화(횃불을 줄로 연결해 바다 위에 띄운 것) 불이 앞을 가로막았다. 적군은 ‘이것마저 정녕 이순신의 복병이리라’ 한숨을 지으며 다시 뱃머리를 돌렸다.

갈 길을 잃은 적선은 문어포(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북쪽의 포구)에 잠시 내려 길을 물었다. 사람들은 ‘한산도 쪽으로 가면 외양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순신의 계책이었다. 한산도 쪽으로 가면 막다른 골목이었다. 벼랑에 몰린 적군은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그중엔 장수 협판좌병위脇坂左兵衛(와키자카 사베에), 진과좌마윤眞鍋左馬允(마나베 사마노조)이 탄 배도 있었다. 그들은 좁은 한산도 바다에서 일대 야전을 펼쳤다. 포성이 산악을 흔들고 화광은 하늘에 닿을 듯할 정도로 치열했다.

결국은 적선은 모두 불타고 깨졌다. 오직 진과좌마윤의 배 한척만이 겨우 도망쳐 부하 장졸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협판좌병위 등 나머지 군사들은 한산도 바다의 귀신이 되고 말았다. 1592년 7월 8일 3차 출전의 첫번째 싸움, ‘한산도 해전’의 결과는 이처럼 ‘대승’이었다.

부하 수백명을 데리고 산에 오른 진과좌마윤의 배를 조선 수군은 불살라 버렸다. 진과좌마윤은 산 위에서 자기가 탔던 배에 불이 붙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기 나라의 병선들이 모두 불타 섬멸되는 참담한 광경도 내려다봤다. 문득 자기만 목숨을 보존해 도망한 것이 부끄러워 자기네 임금과 조상의 영靈을 부르며 통곡하고 할복자살하였다. 부하들 중 20여명도 진과좌마윤의 장렬한 죽음을 따라 배를 갈라 죽었다. 나머지는 혹시나 도망할 길이 있나 하고 캄캄한 밤중 수풀 속으로 도망쳤다.

한산도 해전 다음날인 7월 9일 아침 도망한 적병의 종적을 수색하는 조선 군사는 진과씨 이하 20여인이 할복자살한 자리를 발견하고 순신에게 보고하였다. 순신은 그 정경을 양해하고 군사를 지휘하여 시체를 묻어줬다. 또한 술과 음식을 놓고 축제문을 지어 그 충혼을 위로하였다.

한산도 싸움에 이순신이 사용한 낙화絡火라는 건 연강거화連江炬火나 초부草桴라고 불린다. 7~8척 되는 나무 두개를 교차해 십자형을 만들어 수면에 띄운다. 교차점인 중앙에 3척쯤 되는 돛대를 세우고 그 위에 횃불을 2~3개씩 달아 불을 켜면 낙화가 된다. 이렇게 수천개를 만들어 줄로 연결하여 띄우고 밤에 발화하면 수백척의 병선이 연환진을 벌인 것처럼 보인다. 순신의 계략은 이것이었다.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이 패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일본군은 전함대의 세력으로 전라·충청·경기·황해의 연해를 차례로 점령한 뒤 조선의 제해권을 장악했을 것이다.

학익진 전법에 적군은 수몰

또한 조선 땅으로 오직 하나 남아 있던 전라도마저 적의 수중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평양에 있는 소서행장, 종의지 등 제장은 수군 10만과 합세해 평양 이북으로 출병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평안도 서북변을 마지막으로 석권했을 것이고, 의주까지 들이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선조는 모든 조선을 내어주고 압록강을 건너가게 됐을 것이니, 그리 된다면 삼천리 우리 강산은 풍신수길의 손바닥에 들어가 회복할 길이 망연했을 것이다. 한산도 해전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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