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조직의 실체

보이스피싱 조직. 그 뿌리는 국내에 없다. 총괄책은 해외를 활보하고, 콜센터도 해외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있다. 뻔한 수법으로 누군가를 공략하지만 보이스피싱 조직을 검거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령처럼 나타났다 돈만 쏙 빼먹고 사라지는 보이스피싱. 그 실체를 살펴봤다.

▲ 감소세를 보이던 보이스피싱 피해 건수가 최근 다시 증가하고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두 딸을 둔 평범한 직장인 김대경(가명ㆍ42)씨는 보이스피싱이란 말만 들어도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2년 전 당했던 보이스피싱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해서다. 2013년 4월 23일 오전 10시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보던 김씨에게 끔직한 기억을 남길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큰딸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교무주임이라고 밝힌 한 여성은 “아이가 아직 학교에 오지 않았다”며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돼 전화를 드렸다”고 말했다. 순간 ‘보이스피싱’을 의심했지만 반, 번호, 담임선생님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말하자 김씨의 의심은 걱정으로 변했다. 게다가 교무주임이라고 밝힌 여성은 아이의 신원을 파악해 달라는 말만 남기곤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학교에 있어야 할 딸아이가 등교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당황한 김씨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위치를 물었다. 하지만 학교에 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후 딸아이의 휴대전화로 수십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묵묵부답. 김씨는 황급히 걸려왔던 전화번호로 다시 연락을 취했다. “○○초등학교 교무주임 ○○입니다.” 김씨는 딸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며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보이스피싱이라는 의심은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교무주임이라고 밝힌 여성은 김씨에게 학교 인근을 찾아볼테니 빨리 경찰에 연락을 하라는 조언까지 했다. 신고를 위해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발신자로 딸아이의 휴대전화 번호가 찍힌 전화가 왔다. 하지만 전화기에서는 딸아이가 아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를 데리고 있으니 살리고 싶으면 1000만원을 입금하라는 범인의 협박이 시작됐다. 혹시라도 전화를 끊거나 경찰에게 알리면 아이를 해치겠다고 윽박질렀고 수화기 건너편에선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까지 들렸다.

이성을 잃은 김씨는 범인이 불러준 계좌로 통장에 들어있는 예금 800만원을 입금했다. 범인은 입금 사실을 확인한 후 다시 연락을 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사이 아내에게 딸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는 확인 전화를 받았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김씨는 급하게 예금지급 중지를 신청했지만 돈은 이미 인출된 뒤였다. 김씨는 “내가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평소 보이스피싱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지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금전적인 피해는 2차적인 문제”라며 “당시의 충격과 ‘내가 왜 그랬을까’란 자책으로 한동안 괴로웠다”고 전했다.

보이스피싱(Voice Phishing)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보이스피싱은 음성(Voice)과 개인정보(Private Data), 낚시(Fishing)를 합성한 용어로 대표적인 전화사기다. 보이스피싱은 2000년대 초반 대만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확대됐고 국내에선 2006년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보이스피싱 사건은 2011년 8244건으로 정점을 찍은 뒤 감소했지만 최근 증가세로 돌아섰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신고된 보이스피싱 발생건수는 7635건, 피해액은 974억원에 달한다. 1인당 평균 1275만원의 피해를 입었다는 얘기다. 여기에 신고되지 않은 피해를 더할 경우 피해건수와 피해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공산이 크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보이스피싱의 피해가 딴 세상 이야기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착각이다. 김씨의 사례처럼 개인정보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짜고 특정인을 노리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사실 이전의 보이스피싱은 금융회사ㆍ정부기관을 사칭하는 ‘기관사칭형’, 개인정보노출ㆍ자녀납치ㆍ범죄사건 연루 등으로 피해자를 공격하는 ‘압박형’,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의 번호가 표시되게 하는 ‘발신번호 조작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구분이 무의미하다. 모든 수법을 동원한 범죄가 늘고 있어서다. 문제는 범죄의 수법은 진화하고 있지만 검거율은 떨어진다는 점이다. 2011년 경찰은 8244건의 보이스피싱 사건 중 7336건을 검거했고 검거율은 88.98%에 달했다. 하지만 검거율은 2013년 50.07%로 크게 떨어졌고, 지난해에도 54.78%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특성상 추적과 검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이스피싱의 콜센터는 대부분 해외에 있다. 총책임자 역시 해외에 머문다. 국내에는 대포통장 모집책과 빼돌린 돈을 찾는 인출책밖에 없다. 조직의 몸통에 해당하는 총책과 콜센터를 검거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은 지난 2월 보이스피싱을 ‘3대 악성사기범 근절’ 중점과제로 선정했다. 지방청 지능범죄수사대에 전담수사팀을 운영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보이스피싱 사건은 경찰서에서 지방청으로 이관했다. 보이스피싱에선 없어서는 안 될 대포통장 거래의 처벌 범위도 확대했다.

기존엔 접근매체(대포통장ㆍ현금카드ㆍ공인인증서 등)를 사고파는 것과 대가를 받고 빌려주는 행위만 처벌할 수 있었다. 하지만 1월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의 시행으로 대가를 요구하거나 약속하고 빌려주는 행위,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 빌려주는 행위, 접근매체의 보관ㆍ전달ㆍ유통ㆍ알선 행위 등을 모두 처벌할 수 있게 됐다.

보이스피싱 검거율 하락세

전문가들은 보이스피싱을 근본적으로 막으려면 범죄의 사전단계에 해당하는 대포통장의 개설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기동 금융범죄연구센터 소장은 “통장을 개설 과정을 엄격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며 “범죄에 이용하면 형사 처분 등의 규제를 받는 것에 동의한다는 각서만 받아도 대포통장의 생성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회사가 책임을 지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보이스피싱이 발생해도 금융회사는 이렇다 할 책임을 지지 않아서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국장은 “보이스피싱이 발생해도 금융기관의 책임은 크지 않다”며 “범죄 금액의 인출과 송금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는 챙기면서 피해의 책임은 모두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