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대부 ④

‘대부(The Godfather)’는 선과 악의 양극을 따지는 단순한 계몽영화가 아니다. 마피아라는 범죄집단의 이야기를 통해 모순적인 현실을 그대로 담아냈고, 그 중심에 소외된 계층의 정의正義가 있다. 보나세라가 딸의 복수를 청탁하자 돈 콜레오네는 보나세라를 조롱한다.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한 것으로 착각하고 자신을 멀리했던 보나세라의 순진함을 비꼰 거다.

▲ 공동체의 법이 특정 집단을 외면할 때 약자들의 사투가 시작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콜레오네는 보나세라의 충성을 약속받고 이렇게 말한다. “내 친구의 원수는 곧 나의 원수다. 당장 네가 원하는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콜레오네는 청원의 해결사로 행동대장 클레멘자(Clemenza)를 지목한다. 영화에서는 보나세라의 딸을 폭행한 백인 불한당 청년의 마지막이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전반에 나오는 클레멘자의 난폭한 성향을 통해 그 불한당 청년의 죽음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보나세라의 청탁’은 범죄조직의 기원起源 외에도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는 특정 계층이 법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불합리하게 적용할 때 소외 계층은 분노하고, 스스로 그 공동체의 일원임을 거부하게 된다는 걸 보여주는 장치다. 딸을 폭행한 불한당에게 죽음을 요구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문제는 ‘공동체의 정의’가 부당하다고 느끼면 자신의 입장에서 설정한 정의의 기준도 쉽게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자의적인 정의’는 이렇게 탄생한다.

공동체의 법이 나를 지켜주지 못하면 나 역시 공동체의 법을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를 느끼지 못한다. 보나세라가 마피아에 청부살인을 부탁하면서 도덕적 자책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나세라는 되레 어금니에서 뿌드득 소리가 날 만큼 분노에 떨며 살인을 청원한다.

영화를 그대로 현실로 옮겨보자. 오늘도 도심 한쪽에선 철거민들이, 다른 쪽에선 해고노동자들이 쇠막대를 들고 공권력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선량한 시민이기를 포기하고 있다. 이들에게 ‘공동체의 법’이라는 정의는 부당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저지르는 불법은 사소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기득권이 설정한 법과 정의는 기득권만의 것일 뿐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 보나세라의 청탁은 사회시스템에 따라 정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잘 보여준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왜 이렇게 수많은 집단과 계층이 저마다 법을 조롱하면서 자의적인 정의를 부르짖게 됐을까. 혹시 우리의 공동체의 법이라는 것이 특정집단과 계층에만 유리하게 적용돼 온 건 아닐까. 공동체의 법과 정의의 적용이 최소한의 공정성과 보편성 확보에 실패하면 우리 사회는 분노하고 대항하는 수많은 무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종종 공동체의 법을 무시하고 자의적인 정의를 주장하면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을 단죄하기에 앞서 과연 공동체의 법의 적용이 상식적인 판단에서 정의로웠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게 순리다.
김상회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 학장 sahngwhe@kop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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