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경제의 공포

▲ 미국은 대공황 당시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을 올려주면서 불황을 타개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저금리는 돈 없는 사람을 유혹한다. 쥐꼬리만한 이자만 지급해도 ‘큰돈’을 거머쥘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이자가 오르면 상황이 반전된다. ‘큰돈’은 벌써 써버렸는데, 원리금은 그대로 남아 사람의 목줄을 조인다. 이 때문에 글로벌 투자은행까지 무너졌으니, 말 다하지 않았나. 부채경제의 달콤한 유혹에서 빠져나와야 할 때다. 소득주의성장, 이게 답이다.

한국경제가 암울하다. 임금은 오르지 않고, 대출 원리금은 쌓여간다. 중산층이 무너져 내수시장에 활력이 돌지 않는다. 특히 가계부채는 한국경제의 목줄을 조인다. 지난해 말 기준 가계부채 규모는 1089조원. 이중 주택담보대출 비중이 약 530조원이다. 쥐꼬리만한 월급 대부분이 대출 원리금 상환에 쓰이고 있다는 뜻이다.

한은 금통위는 꽁꽁 얼어붙은 내수를 살리기 위해 ‘금리인하’ 카드를 꺼내들었다. 3월 12일엔 사상 첫 1%대 금리를 실현시켰다. 경기는 살아날까. 안타깝게도 ‘금리인하를 통해 경제가 살아난다는 건 검증된 바 없다’는 게 대다수 경제전문가의 주장이다. 특히 지금처럼 가계부채가 많은 상황에선 말이다.

 
그럼 한국경제는 언제부터 부채에 의존하게 됐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선 1997년 외환위기 시절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당시 국내 경제시스템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몸집이 공룡만큼 커져 효율성이 떨어진 기업은 강력한 구조조정에 착수했고, 이 과정에서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은 정리됐다.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목으로 정리해고가 단행됐고, 성과주의가 들어서면서 실질 임금은 낮아졌다. 기업에 돈을 빌려줬다가 낭패를 본 은행은 가계대출로 전환했다. 기업보다 투명한 관리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금회수도 손쉬웠기 때문이다.

정부는 금리를 낮춰 가계가 돈을 빌려 쓰도록 도왔다. 임금만 받아선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 가계는 ‘부동산 불패신화’에 매료돼 빚을 내 집을 샀다. 이때부터 부동산 시장은 국내 경제의 가장 중요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가계부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부채경제 시스템이 형성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채경제를 떠받치는 것도 있었다. 다름 아닌 ‘수출’이다. 금리가 내려가면서 원화가치도 떨어졌다. 기업은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수출을 늘렸다. 체감경기는 바닥인데 기업들이 지난해 사상 최대 수출액을 달성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문제는 이런 부채경제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기 힘들다는 거다.

무엇보다 수출이 예년만 못하다. 원화가치가 오르면서 우리나라 수출제품이 가격경쟁력을 잃었다. 가계부채도 눈덩이처럼 불어난지 오래다. 특히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처분 가능한 소득으로 상환해야 하는 금융부채 비율)은 2008년 144.3%에서 2013년말 기준 160.7%까지 올랐다. 한달에 100만원을 버는 사람이 매달 갚아야 돈이 160만7000원이라는 얘기다. 쓸 수 있는 돈보다 부채가 더 많은 셈이다.

더구나 이 비율은 단 한번도 경제성장률보다 낮았던 적이 없다. 국가 전체가 벌어들이는 돈보다 부채가 더 많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가 올라 돈을 갚지 못하게 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빚이 고스란히 은행의 부실로 이어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금리인하가 부채경제를 부추기면 경제시스템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거다.

 
이런 위험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다. 가계소득을 늘리는 거다. 그래야 쓸 돈이 생기고, 기업도 돈을 벌어 투자를 할 수 있다. 순수한 소득이 아닌 빚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최근 미국을 비롯해 중국ㆍ일본ㆍ유럽까지 내수진작을 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최저임금을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최저 임금을 높인다고 늘어나는 소득은 크지 않다. 때문에 박근혜 정부 초기에 잠깐 반짝하고 사라진 복지정책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실질 소득 올리는 게 정답

이상동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 부원장의 말을 들어보자. “대공황 당시 미국의 뉴딜정책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뉴딜의 기초는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을 늘려 수요를 확대하는 거였고, 이를 통해 대공황을 극복했다.” 소득을 늘릴 거시경제정책이 필요하다는 거다.

실제로 미국은 경기활성화와 내수진작을 위해 실질 임금을 인상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추구하는 건 단 하나다. 가계부채를 줄이려는 거다. 미국의 가계부채 비율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매년 줄고 있다. 가계 빚으로 경기를 부양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다. 조원희 국민대(경제학) 교수도 “결국은 실질임금을 올리고 복지시스템을 강화해 가계가 돈을 빌리지 않고도 소비를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며 “그러려면 수출주도형 경제모델이 아닌 내수와 소득주도형 경제모델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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