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일의 다르게 보는 경영수업

▲ 비자금은 만드는 것도 쓰는 것도 쉽다. 그만큼 쉽게 중독된다. [사진=뉴시스]
영수증도 필요 없다. 윗선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그냥 쓰고 대충 처리하면 그만이다. 비자금은 이처럼 만드는 것도, 쓰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런 비자금이 회사를 좀먹는다는 점이다. 마치 아편과 같은 비자금의 실체를 살펴봤다.

필자의 임원 시절 소관부서는 대외기부금도 담당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정치인, 공익법인, 학교, 자선단체 등이 기부요청을 많이 했다. 하지만 세무상 제한규정(소득의 일정액만 기부로 인정) 때문에 꼭 필요한 단체에만 기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무리의 사람들이 우리 부서로 몰려들어왔다. 하반신이 불편한 사람, 눈이 어두운 사람 등 말 그대로 장애인 단체였다.

몇주전 그 단체의 대표가 우리를 찾아와 ‘수십명의 장애인들이 의지하면서 사는 주거시설이 지나치게 낡아서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거절한 바 있었다. 이 단체가 공식단체가 아닌데다 윗분의 결재 또한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호소가 통하지 않자 이번엔 ‘무리로 들어와’ 하소연을 할 요량이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윗분에게 보고를 했지만 되돌아온 답은 냉정했다.

“어이, 김 이사. 그런 협박에 굴하면 안돼. 저런 사람들은 한번 기부하면 버릇 돼서 끝없이 몰려들어 감당 못해. 절대 하지마. 안그래도 기부요청이 많아 골치 아픈데 말이야. 저번에 여당에 기부했는데, 이번엔 야당에도 보험금을 넣어야 하지 않겠나. A국회의원도 주고 말야. 또 B대학에 기부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라이벌 C대학에서도 달라고 아우성이야.”

하지만 회원들의 요구를 거절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필자는 과감하게 “일주일 안에 기부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돌려보냈다. 경비가 인정되지 않는데다 윗선도 결재를 하지 않아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비자금을 활용하는 거였다. 필자는 전결을 통해 직원들의 국내외 출장경비를 끄집어내 그 단체에 기부를 했다. 물론 직원들은 출장을 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비자금이었기 때문에 영수증도, 결재도 필요 없었다. 이 불법 비자금을 받은 장애인들의 표정은 파랑새를 보는 듯 밝았다. 그 단체의 대표가 했던 말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감사합니다. 실은 재벌은 도둑놈이라고 생각해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많은 재벌을 찾아갔지만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그룹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래서 복을 많이 받을 겁니다. 이 돈으로 우리 장애인들이 사는 집을 수리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듯합니다.”

필자는 비자금의 편리함에 유혹됐다. 영수증 처리가 어려운 것, 윗선이 결재를 하지 않는 것 등에는 비자금을 사용했다. 부서에 필요한 경비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랬다. 심지어 단골식당의 영수증을 모아 경비를 처리하면서 비자금을 조성한 적도 있다. 비자금에 한번 맛을 들이니, 도무지 빠져나오기 어려웠다. 눈먼 돈, 주인 없는 돈을 아무도 모르게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부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필자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았다. 필자의 ‘비자금 활용책’을 본 다른 임원들도 속속 비자금을 조성ㆍ집행하기 시작했다. 비자금의 ‘비’자도 혐오하던 임원이 ‘무리’에 동화됐음은 물론이다. 비자금 탓에 회사가 입은 손해가 얼마나 컸을까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기업경영자뿐만 아니라 임원들이 비자금이란 아편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자금의 폐해는 크다.
김우일 대우M&A 대표 wikimokg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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