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마침내 김석준(62) 쌍용건설 회장이 웃었다. 7전8기七顚八起 끝에 두바이투자청을 새 주인으로 맞은 데 이어  법정관리도 조기 졸업했기 때문. 이제 분신처럼 여겼던 회사가 쓰러질까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 ‘건설 명가’ 쌍용건설 재건에 매진하는 일만 남았다. 그는 재계 순위 5위까지 올랐던 쌍용그룹 오너 회장에서 쌍용건설 전문경영인으로 완전히 변신했다. 집념의 오뚝이 기업인, 그의 재기 행보에 재계의 기대가 크다.

▲ 김석준 회장은 무너진 건설 명가 쌍용건설이 재기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사진=뉴시스]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은 ‘파란만장한 기업인’이다. 한국 재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잘나가는 쌍용그룹 오너 2세 경영자에서 쌍용건설 오너 경영자로, 마침내 쌍용건설 전문경영인으로 변신했다. 여간한 집념이 없으면 버텨내기 힘든 일이다. 세인들의 눈에 그는 갈수록 추락하는 재벌 2세 경영자로 비쳤을 뿐이다. 변하지 않은 게 있었다면 다른 두 형제(형 석원ㆍ동생 석동)와 달리 38년째 ‘쌍용맨’이란 타이틀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창업자(고故 김성곤)의 차남이었던 그는 1977년(24세) 부푼 기대 속에 ㈜쌍용 기획조정실 사원으로 입사한다. 창업자 작고(1975년) 얼마 후였던 당시는 장남 김석원 회장이 경영권을 이어받아 그룹을 이끌 때였다. 쌍용은 1980~90년대 재계 순위 5ㆍ6위권을 마크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김석준 회장도 1983년(30세) 쌍용건설 사장에 올랐고, 1995년(42세)엔 정계로 진출한 형 대신 그룹 회장이란 중책까지 맡았다. 하지만 자동차 사업 실패와 1997년 IMF 외환위기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그룹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고, 2004년 완전 와해되기에 이른다. 이런 위기 속에서 그는 쌍용건설 대표이사 회장으로 쌍용건설 경영에 집중하게 된다. 자기 젊음을 송두리째 바쳐가며 키웠던 회사이기 때문에 애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초창기 쌍용건설은 후발 건설사로 출발(1977년)한 탓에 국내 건설 시장에서는 물론 그룹 내에서조차 홀대를 받았다. 1982년(29세) 6월 이사로 건설과 인연을 맺은 그는 돌파구를 해외건설에서 찾았다. 싱가포르의 랜드마크가 된 ‘래플스 시티’(73층ㆍ1986년 완공) 등 해외 고급 건축물 시공에 전력질주한 건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곳곳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게 건설 성장의 큰 전환점이 됐다. 1990년대 중반엔 매출 3조원, 시공능력 6위로 기존 대형 건설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컸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여파는 피해 갈 수 없었다. 계열사 매각이나 계열분리가 진행되면서 쌍용건설도 1998년 1차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신청하게 된다. 그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사재를 출연했고, 자택 담보 대출금 20억원을 전액 유상증자에 넣기도 했다. 갖은 노력에 힘입어 6년 만인 2004년 워크아웃을 일단 졸업했다. 힘에 부친 그는 2006년 새 주인 찾기(매각)를 본격화한다.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는 등 배수진을 치고 2007년부터 2013년까지 7년간 일곱 차례나 매각을 시도한다.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잇따른 인수ㆍ합병(M&A) 실패로 ‘재기 불능’이란 얘기까지 들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2013년에는 경기침체로 인한 경영난으로 2차 워크아웃(2월)과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ㆍ12월)를 신청하기에 이른다(표 참조).

 
유례없는 파란만장한 기업인

희망의 끈이 끊어지려고 할 즈음, 김 회장은 여덟번째 M&A를 성사시켜 마침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올 1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투자청(ICD)의 투자 유치에 성공한 것. 마침내 지분의 약 90%를 1700억원에 사들인 두바이투자청에 인수됐다. 끈기와 인내, 기술과 신용의 승리였다. 건설계열사가 없었던 두바이투자청의 아시아ㆍ아프리카 진출 전략과도 맞아떨어졌다.

물론 쌍용건설의 숱한 해외 건설 실적과 김 회장에 대한 신뢰도 등이 깊이 감안됐다고 한다. 법정관리 중인 기업에 투자결정을 한 게 그것을 방증한다. 특히 고급 건축과 고부가가치 토목사업 등에 대한 글로벌 경쟁력, 해외 발주처들로부터 받은 높은 신인도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두바이투자청은 아시아ㆍ아프리카ㆍ중동 등지의 초대형 개발 사업을 비롯해 ‘2020년 두바이 EXPO’까지 추진 중이어서 글로벌 인지도가 높은 시공사가 필요했을 것”이라며 “쌍용건설이 7년간 매각이 지연되는 등 힘든 가운데서도 꾸준히 해외 실적을 쌓고 신용과 경쟁력을 유지했던 게 먹혀들었다”고 진단했다.

세계적 국부 펀드인 두바이투자청은 아랍에미리트연합의 2대 국부 펀드 중 하나다. 운용 자산 규모는 약 1600억 달러(175조원). 자산 기준 UAE 1위 은행인 에미리트NBD(ENBD)와 국영기업 에미레이트항공, 에미리트석유공사 등 계열 기업만 30여개다. 세계 최고층 호텔 ‘부르즈 할리파’를 소유한 두바이 최대 부동산개발회사 ‘에마르’를 통해 다양한 초대형 개발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1월에 새 주인을 찾은데 힘입어 3월에도 경사가 겹쳤다. 지난 3월 26일 법정관리를 조기에 졸업한 것이다. 2013년 12월 법정관리를 신청한 지 1년3개월 만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파산부는 3월 26일 “쌍용건설의 회생절차 종결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쌍용건설 측은 “세계적 국부 펀드가 대주주가 된 만큼 국내외 신인도가 높아지고 법정관리도 졸업해 국내외 영업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며 반색했다. 연간 수주 규모가 최소 4조〜5조원까지는 올라갈 것이란 낙관적인 전망도 내놓았다. 특히 두바이투자청 자체 발주공사와 2020년 두바이 엑스포 관련 물량 수주에 거는 기대감이 높다.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두바이투자청 공사만 따도 몇 년 먹거리는 해결된다는 얘기다.

만난萬難을 이겨낸 김 회장의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경영을 잘 해서 채권단과 주주, 협력업체 등에 피해를 끼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법정관리 졸업이 기쁘기도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더 잘 할 수 있을지 부담도 된다”며 “국민에게 신세를 많이 졌으니 회사가 잘 돼 고용창출을 많이 하고, 국익에 보탬이 되는 일도 해야겠다”고 말했다. 자신을 믿고 끝까지 따라준 직원들에게도 “법정관리까지 추락했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일해 줘서 고맙다. 시장의 신뢰를 잃지 않은 것은 모두 직원들의 노력 덕분이다. 믿고 따라줘서 정말 고맙다”며 무한한 애정을 표시했다. 회사가 재기할 것이란 직원들의 믿음, 꾸준히 쌓아온 발주처와의 신뢰가 결국 칠전팔기의 성과로 이어졌다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 쌍용건설이 두바이투자청을 새 주인으로 맞았다.[사진=뉴시스]
“나는 최고경영자 아닌 최고영업맨”

회사가 재건에 시동을 걸면서 여러 면에서 희망 섞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첫번째가 인력 충원이다. 올해초 60여명을 신규 채용했고, 조만간 경력직 채용도 서두르고 있다. 2011년 2400명이었던 인력이 720명까지로 급감했기 때문. 떠났던 직원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가 하면 해외 수주에도 발동을 다시 걸고 있다. 자신을 최고경영자라기보다 최고영업맨으로 불러 주기를 좋아한다는 김 회장도 다시금 해외 수주의 고삐를 죄고 있다. 그의 희망은 ‘건설 명가 쌍용건설의 완전한 재건’일 것이다. 재계 5위를 축성했던 쌍용그룹 오너 회장에서 쌍용건설 전문경영인으로 완전히 변신한 그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성태원 더스쿠프 대기자 iexlov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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