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59)

▲ 이순신이 대소 병선과 거북선을 출동시켜 적을 공격하자, 일본군은 그 위세를 당해내지 못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순신은 쇠를 울려 싸움을 종료했다. 썰물이 빠지기 전에 함대를 물 깊은 곳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순신의 공격에 대패한 적선은 육지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싸움이 막을 내리자 병선이 적다는 핑계로 멀리서만 바라만 보던 원균이 썰물에 떠내려오는 적의 시체를 건져 머리를 베어 모으길 일삼았다.

선조가 ‘이순신 정1품 하사’를 철회하자 서인西人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이순신을 아끼는 유성룡이 불만을 품은 것도 아니었다. 이순신의 성품을 워낙 잘 알았기 때문이다. 둘은 문경지교刎頸之交이며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 순신이란 사람이 작위의 진급 여부에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한산도 승전이 없었다면 조선의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순신 작위를 고민할 겨를이 유성룡에겐 없었던 거다. 그는 「징비록懲毖錄」에 한산도 싸움을 이렇게 기록했다.

蓋敵本欲 水陸兩路軍 合勢西下 賴此一戰 遂斷敵一臂 行長等雖得平壤 勢孤不敢更進 國家得保湖南湖西 以及海西關西沿海一帶 調度軍食 傳通號令 以濟中興之業 遼東山海關天津山東等地 不被震驚 使明兵從陸路來援 以致却敵於者 皆此一戰之功 嗚呼豈非大哉. 적은 본래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가려 했지만 이 한번의 전투로 적의 한팔이 끊어지게 되었다. 소서행장이 비록 평양을 얻었으나 그 세력이 고립되어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국가가 호남과 호서를 보전하니 이로써 황해도와 평안도 연해 일대까지 지키게 되었고, 군량이 조달되고 호령이 통하여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요동, 산해관, 천진 등지가 침범을 당하지 않아 명나라 군사가 조선으로 출병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전투의 공이다. 오호라, 어찌 큰 업적이 아니겠는가.

고성 견내량에서 밤을 지낸 이순신은 이튿날인 7월 9일 가덕에서 안골포로 향하는 곳에 적선 40여척이 있다는 탐망선의 보고를 받았다. 전날 밤에 견내량에서 야습하려고 왔던 적의 함대인 듯하다. 지난 6월 구귀가륭, 등당고호 등 패전하였던 장수들이 새로 병선과 군사를 얻어 따라오던 함대일 것이다. 보고를 받은 순신은 이억기와 원균 이하 제장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40여척의 적선을 공격할 계책을 의논하였다. 그리고 거제 칠천도漆川島, 일명 온천도溫川島에 도착해 밤을 지냈다.

드디어 위엄 드러내는 거북선

7월 10일 새벽녘에 칠천도를 떠나면서 순신은 우수사 이억기에게 다음과 같은 영令을 남겼다. “이곳을 떠나지 말고 가덕도 쪽으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먼저 가서 접전을 펼치거든 달려나오라.” 적이 조선 수군을 보면 놀라서 싸우지 아니할 것 같으니 세력을 나눠 약한 것처럼 보이자는 계책이었다. 대소 병선 20척을 갖고 있는 원균에겐 자신의 뒤를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적은 쉽게 따라나오지 않았다. 안골포 밖에서 기다리던 순신은 몇척을 적 쪽으로 보내 응전을 시도했다. 하지만 한산도 대첩에서 패망한 기억 때문인지 적은 요지부동. 순신은 어쩔 수 없이 안골포 쪽으로 직접 진입하는 전술을 쓰기로 했다.

대소 병선과 거북선까지 출동시켜 적의 3층각선, 2층각선을 차례로 공격했다. 천지현자 또는 승자 각양 대포, 장편전 유엽전도 빗발같이 퍼부었다. 적도 사력을 다해 응전했지만 조선 수군의 위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접전이 일어난 포성을 들은 이억기의 함대가 약속한 대로 달려오자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거북선이 2척이나 포구 안으로 들어가 좌충우돌하는 바람에 적의 중소선은 부딪쳐 깨지고 대선들도 감히 대들지를 못하였다.

오직 3층각선과 2층각선만 대항하는 모양이었다. 대단히 견고해 대포를 맞아도 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순신은 3층각선과 2층각선을 깨뜨리는 걸 싸움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 싸움은 날이 저물도록 계속됐다. 마침내 3층각선과 2층각선이 화전을 맞아 불이 붙었다. 배들이 타는 화광은 석양의 하늘을 더욱 붉게 물들었다. 적군은 울고 소리를 지르며 갈팡질팡했다. 급하게 남은 소선을 타고 불을 피해 육지로 오르려는 적군도 많았다.

▲ 수급만 탐내는 원균을 보고 이억기와 군사들은 조롱을 쏟아부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하지만 순신은 쇠를 울려 싸움을 종료했다. 썰물이 빠지기 전에 함대를 물 깊은 곳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병선이 적다는 핑계로 싸움을 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만 보던 원균은 썰물에 떠내려오는 적의 시체를 건져 머리를 베어 모으길 일삼았다. 한산도 싸움 이후에도 그러더니 또 적병 머리에만 탐을 낸 것이다. 순신과 이억기 군사들이 원균의 군사들을 향해 욕을 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굿만 보고 있다가 떡만 먹으려 드는가.”

이 광경을 본 순신은 휘하의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싸우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싸워서 적병을 죽이고 싸움을 이기는 게 우리의 일이다. 우리 군인은 신성한 심법心法을 가져야 한다. 너희들의 공은 내가 보아서 알고 있으니 수급을 자랑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원균은 뱃머리를 돌리는 순신과 이억기에게 “적선을 맞아 없애지 아니하고 왜 퇴각하시오”라고 쏘아붙였다. 순신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적병이 육지로 올랐으니 수로로 나갈 길을 끊으면 육지에 있는 우리 백성들이 해를 당할 것이니까 일부러 길을 열어 주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원균은 “소인이 이 포구에 떨어져 지키겠소”라며 자기에게 딸린 경상우도 제선을 거느리고 포구 밖에 남아 있으려 하였다.

군인의 심법 강조하는 순신

이억기는 원균에게 이렇게 핀잔을 줬다. “영감은 조수에 떠나오는 적군의 목을 더 베고 또 패전한 적선이 나오거든 최후의 승리를 독점하려고 하는구려. 그것 참 싸우지 않고 공을 이루는 것이니 하염직한 일이오.” 원균의 안색은 붉어졌다. 순신은 정색하여 “자고로 군제란 일치행동을 주로 하는 것이거늘 자의로 배반하면 군율이 있을 수 없소”라며 단연히 불허하였다.

순신은 전함대를 몰고 포구밖 10리쯤에 닻을 내리고 밤을 지냈다. 이튿날 다시 포구를 향하여 적의 종적을 찾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남은 적선은 부산 방면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제는 이곳 백성들이 부대낄 염려가 없다고 판단한 순신은 근심을 놓고 전승한 자취를 살펴보았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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