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당국 비웃는 사채꾼의 세계

  모든 사채업자가 금시계를 찬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사채업자가 채무자를 향해 육두문자를 내뱉는다고 생각하는가. 둘 다 아니다. 요즘 사채업자 멋들어진 양복을 입고 점잖게 서민을 괴롭힌다. ‘법망’ 안에서 ‘법망’을 흔드는 그들. 지능적인 사채꾼의 무서운 가면을 벗겨봤다.

중소 부품업체 A사. 한때는 유럽시장에 부품을 납품하는 강소(强小)기업이었지만 요즘 신세는 처량하다. 원료값이 치솟은 데다 유럽시장까지 위축돼 수출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A사의 지난해 영업손실은 33억원, 당기순손실은 63억원이었다. 부채는 250억원을 훌쩍 넘어섰다. 사실상 자본잠식 상태. A사 대표 김영철(가명)씨는 ‘급전(急錢)’을 구하는 게 일상이 됐다. CEO로서 체통을 지키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직원 월급은 1년째 밀렸다. 불투명한 회사의 미래 때문에 퇴직한 직원들은 연방 “퇴직금 내놓으라”며 아우성이다.

올해 초. 김씨는 ‘사채의 늪’에 스스로 들어갔다. 사채가 ‘무서운 덫’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사 사정이 그만큼 궁했다. 그런데 웬걸. 그가 방문한 사채업체는 영화ㆍ드라마에서 보던 흉흉한 곳이 아니었다. 사무실은 깨끗했다. 사채업체 사장은 금목걸이를 두르지도, 금시계를 차지도 않았다. 고급양복을 입고 정중하게 그를 맞았다.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는 법정이자율 39%를 반드시 지킵니다.” 말만 그런 게 아니었다. 계약서에도 명시돼 있었다. 사채업체 사장은 “변호사 공증을 받아도 된다”는 추임새까지 날렸다.

사채업체 사장의 호의 덕분에 A사는 돈을 빌렸고, 급한 불을 껐다. 하지만 불씨를 완전히 죽이진 못했다. 그 정도 급전으로 자금난이 해소되기를 바란 게 문제였다. 다시 사채업체 사장을 찾아간 김씨는 이렇게 청했다. “돈을 못 갚을 것 같다. 조금만 더 기회를 달라.” 사채업체 사장은 이번에도 호의를 베풀었다. 되레 “양심적인 업체를 소개해 주겠다”며 발 벗고 나섰다. 김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착한 사채업자인 줄만 알았다”고 털어놨다.

사장이 소개한 사체업체 역시 강남에 있었다. “39% 법정 최고 이자율을 지킵니다”는 문구가 붙어 있는 사무실은 깨끗했다. 믿음이 갔다. 김씨는 똑같은 방식으로 돈을 빌렸다. 몇 번이나 더 그랬다. 이게 사채업자의 ‘마수(魔手)’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샌가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렇게 친절했던 사채업자들은 그제야 본색을 드러냈다. 동시다발적인 협박이 시작됐다. 급기야 김씨는 경영권 포기각서까지 써야 할 지경에 몰렸다. 김씨는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들 사채업자는 한통속이었다”고 말했다. 사채업자들의 ‘짜고 친 고스톱’에 놀아난 셈이다.

지능적인 사채업자 출현 “단속 어렵다”

김씨는 경찰에 피해사실을 신고했다. 별 소득이 없었다. 경찰은 “사채업체들이 법정이자율을 지켰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고 판단했다. 사채업자가 한통속이라는 김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연관성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대기업이라도 이런 교묘한 수법에 걸리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채업자가 진화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머리가 짧고, 금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금시계를 차고, 거친 욕을 하지 않는다.

법정이자율 39%의 테두리에서 서민의 등골을 뽑아먹고 있다. 그들은 지금 ‘무서운 가면’을 쓰고 있다. 지능적인 사채꾼의 실체를 좀 더 파헤쳐 보자.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지난해 6월. 정부가 ‘제2 금융권의 돈줄’을 죄기 시작했다. 금융위원회는 은행보다 훨씬 빠르게 가계대출을 늘린 상호금융사(농ㆍ수ㆍ신협 등)와 보험사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시중은행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제2금융권으로 몰리는 ‘풍선효과(용어설명)’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어찌 보면 타당한 조치였다. 지난해 은행 가계대출은 5.7% 늘었지만 제2금융권의 증가율은 10%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가계대출을 지금 관리하지 않으면 금융사의 건전성이 떨어져 서민에게 더 큰 피해가 돌아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민 입장에서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시중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한 사람 중 대부분이 단위농협을 찾는다”며 “상호금융사의 대출을 묶으면 신용이 낮은 사람들은 대부업체나 사금융(私金融•용어설명)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금융소비자연맹 관계자도 “근본적 해결책 없이 서민의 돈줄만 조이겠다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저(低)신용자의 대출이 힘들어지면서 불법 사채시장이 커지고 있다. 2008년 4조4000억원이던 불법 사채 규모는 최근 들어 5~7배 커졌다. 불법 사금융에 노출된 저신용자의 숫자도 상당하다. 현재 7등급 이상의 저신용자는 700만명 수준이다. 그중 서민 우대 금융(미소금융ㆍ햇살금용) 수혜자가 118만명, 대부업 이용자는 252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를 제외한 약 330만명이 불법 사금융에 노출됐다고 볼 수 있다.

불법 사채 규모 20조원 넘어

정부는 대대적인 단속으로 불법 사금융을 근절할 방침이다. 경찰과 금융감독원은 지난해부터 공조수사를 벌이고 있다. 나름 성과도 있었다. 경찰은 지난해 3월~6월 실시한 수사를 통해 불법 사금융 범죄 2167건을 적발하고, 3879명을 검거했다. 그중 34명이 구속됐다. 경찰 관계자는 “금감원과 공조를 강화한 결과, 수사의 효율성이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국세청도 힘을 보태고 있다. 최근 불법 추심 등의 방법으로 세금을 탈루한 악덕 대부업자 253명을 적발하고 1600억원을 추징했다. 대부업자 123명까지 선별해 세무조사에 돌입했다. 국세청 관계자는 “금융거래를 끝까지 추적해서 불법 사채업자를 찾아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감독당국의 생각만큼 단속이 쉽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단속은 늘 한 박자 느리지만 범죄 수법은 빠르게 진화해서다. 쫓는 자보다 쫓기는 자가 ‘숨는 방법’을 더 많이 고민하는 법 아니던가.

특히 사채시장의 몸통이라는 ‘전주(錢主)’가 그렇다. 전주는 사채업자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이다. 사채업자는 전주에게 이자를 내기 때문에 채무자에겐 더 많은 이자를 받을 수밖에 없다. 채무자의 이자율이 수백~수천%에 이르는 이유다.

사채의 시작과 끝은 전주(錢主)

더구나 대부분의 전주는 깐깐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거래를 하지 않는다. 사채업자가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채무자를 괴롭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전주들이 세무조사를 받는 것도 아니다. 한 사채업자의 전주는 이렇게 말했다. “단속? 세무조사? 웃기는 소리다. 정부 단속이 강화되면 세무사에게 돈 몇푼 더 주면 끝이다. 그러면 세무조사 따위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정부 단속이 무서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요즘엔 더 교묘한 수법까지 등장하고 있다. 채무자를 ‘법망’ 안에서 옭아매고 괴롭히는 것이다. A사의 사례처럼 지능적인 사채꾼은 법정 최고 이자율 39%를 절대 어기지 않는다. 협박이나 폭력은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품위 있게 개인재산이나 기업경영권을 은근슬쩍 뺏는다. 이런 교묘한 작전은 감독당국의 단속에도 걸릴 위험이 없다. 법망 안에서 돈 놀이를 하기 때문이다.

현금거래가 쉬운 ‘자동차 사채’도 꼼수 중 꼼수다. 전문 자동차 사채꾼은 할부가 끝난 자동차를 담보로 잡고 채무자가 약속한 기간에 돈을 갚지 못하면 ‘차량포기각서’ ‘운행허가각서’를 받는다. 이를 중고차 시장에 비싼 값에 팔면 짭짤한 수익을 남길 수 있다. 이 역시 ‘불법’이 아니다. 한 사채업자는 “차량을 담보로 잡는 것은 부동산과 달리 거래와 처분이 쉽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지능적인 사채업자는 ‘법망’ 안에서 ‘법망’을 흔들고 있다. 불법 사채를 뿌리 뽑을 대책이 마련돼야 하는 이유다. 한편에선 서민의 대출 문턱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서민우대금융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서민이 합법적으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창구를 더 많이 마련하자는 취지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성과를 내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미소금융ㆍ햇살론ㆍ새희망 홀씨 등 서민우대금융의 규모는 5조4000억원 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미소금융은 이자율이 2~4.5%에 불과하기 때문에 유지비용조차 마련하기 쉽지 않다.

또 다른 한편에선 ‘합법적인 대부업체를 늘리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효율적인 대안이 아니다. 사채업자의 수법이 갈수록 교묘해지기 때문에 어디가 합법인지, 불법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금감원이 2010년 접수한 ‘사금융 피해상담’ 결과를 봐도 그렇다. 상담 결과에 따르면 합법적인 대부업체로부터 피해를 입은 상담자는 전체의 10.2%에 달했다. 이들 대부분은 불법적인 채권추심(19.2%)에 시달렸다.

불법 사금융을 근절하는 방법은 현재로선 하나뿐이다. 불법 사금융이 적발되면 단호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법 사채꾼의 징벌수준은 약하다. 대법원의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0년 대부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1심 판결이 난 1253건 중 징역형은 2.95%(37건)에 불과했다.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셈이다. ‘사채업자가 속 편하게 영업할 수 있도록 법원이 멍석을 깔아준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 사채의 덫에 걸리면 감당하지 못할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불법 사채를 단순한 금전 문제로만 보고 판결하는 법원의 태도 또한 문제다. 조세전문 이성희 변호사는 “무등록 사채업자가 적발되더라도 연 30%까지는 합법이자로 인정 받는다”며 “법원이 불법 사채업자의 권리를 보호하면 불법 사금융은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부업체의 설립 요건이 지나치게 간단하다는 것이다. 현행 대부업법에 따르면 미성년자ㆍ금치산자ㆍ한정치산자ㆍ실형선고 후 5년이 경과되지 않은 자ㆍ집행유예나 선고유예기간 중에 있는 자 등을 제외하면 누구든지 대부업자로 등록할 수 있다. 이성희 변호사는 “대부업의 진입장벽을 높이지 않으면 불법 사금융의 폐해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면을 쓰고 있는 사채꾼을 단속하지 못할 바엔 가면 자체를 쓰지 못하게 만들자는 거다.
불법 사채꾼이 쓰고 있는 무서운 가면. 이젠 벗길 때가 됐다. 지금도 늦었다.
이윤찬 기자 chan4877@ thescoop.co.kr | @ itvfm.co.kr
김성수 객원기자 sung@thescoop.co.kr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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