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8월 24일 순신은 우수사 이억기와 전라도 조방장 정걸丁傑과 함께 160여척의 연합대함대를 거느리고 좌수영 앞바다에서 출발, 위무당당하게 원정의 길을 나섰다. 하지만 적군은 꼬리를 감추고 부산 어디론가 사라졌다. 풍신수길의 명령을 받들어 험고한 항만으로 물러나 버틸 작정이었던 거다.

 일본군과 맞서 싸울 장군이 없는 탓에 순신의 고민은 깊어졌다. 변협·이제신李濟臣·신각 같은 명사들은 이미 다 죽었으며, 김시민·박의장·곽재우·선거이·정기룡·김덕령·황진·조경·김면·원호 등 제장은 한 방면을 지키기에는 넉넉하지만 부산까지 앞서 전진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억기·어영담·이순신李純信·이운룡·권준·정운 같은 제장은 수군에 종사하니 육전陸戰에 투입하기 쉽지 않았다. 방법을 찾지 못한 순신은 조정에 육지에서 싸워야 한다는 뜻을 밝혔지만 최흥원·정철·유성룡·윤두수·유홍·김명원·이원익·김응남·이항복 등 조정 대신들은 당파싸움에 빠져 앞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설사 생각이 있더라도 대군을 만들어 육지에 득세한 적군을 밀어낼 힘도 조선엔 없었다.

순신은 최후의 일책으로 경상도관찰사 김수에게 이렇게 청했다. “수군은 내가 담당해 해상에 있는 적의 함대를 격파하겠소. 적의 도망할 길을 막고 적의 책원지가 되는 부산도 무찌를 것이니, 김수는 경상도내에 있는 의병에게라도 호소하여 수륙이 동시에 호응하여 적을 토멸하도록 도와주시오.” 김수는 지난 4월 중순 적이 부산에 상륙하자마자 동래·양산·김해 등 여러 거진을 수일 내에 함락하자 지레 겁을 먹고 진주성을 버리고 달아난 위인이었다. 그래도 이순신의 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9월 1일 부산의 적의 근거지를 수군과 육군이 힘을 합쳐 토벌하기로 약속했다.

▲ 원균은 전쟁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전쟁에서 뺄 순 없었다. 그의 관할인 경상도에서 싸움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한발 더 나아가 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과 제4차로 출전하기로 약속하고 8월 1일 총 166척의 배를 준비시켰다. 대함대를 거느리고 전라좌수영 앞바다에서 관함식觀艦式을 열고 연습을 거행하니,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이었다. 병위는 실로 장관이어서 창칼과 깃발은 일광을 받아 찬란삼엄하였고 쇠북과 대포 소리는 강산을 진동시켰다. 보성군수 김득광이 순신의 앞에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사또, 이만한 병력을 가졌으니 구태여 동으로 출전하여 사생지간에서 싸울 것이 무엇 있소? 송여종의 말을 듣건대 조정에 충만한 무리들이 우리 수전의 공을 그렇게 대단히 잘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하오. 지금 성상이 1000리 변방인 의주 국경에서 방황하시와 적막히 계시오니 만약 평양에 있는 소서행장의 군사들이 의주까지 들어치면 성상의 대가는 장차 어디로 몽진하시겠소? 사또는 이 길로 함대를 몰고 바로 용만(평안도 의주)으로 가서 성상을 모시고 강도(강화도)에 들어가는 게 상책일까 하오. 그래야 팔로의 의병을 불러 모아 중흥의 대업을 회복할 수 있지 않겠소.”

 원균 믿을 수 없어 고민하는 순신

순신은 노하여 김득광을 책했다. “조정에서 들어와 왕실을 호위하라는 명령이 없이 어찌 대군을 거느리고 행재소를 간단 말이오? 지방의 대장이라면 제일선에 나가 적을 토벌하는 게 나라를 위하는 충의거늘 나보고 함부로 행동을 하라는 게 말이 되오?”  이때 경상도 순찰사 김수로부터 관문이 왔다. “한성 이북으로 갔던 적도들이 낮에는 숨었다가 밤에 행하여 양산·김해 등 강쪽으로 내려오는데 복태(말이나 소에 실어 나르는 짐)를 많이 실은 걸 보면 필시 도망하여 돌아오는 모양이다.”

8월 24일 순신은 우수사 이억기와 전라도 조방장 정걸丁傑과 함께 160여척의 연합대함대를 거느리고 좌수영 앞바다에서 출발, 위무당당하게 원정의 길을 나섰다. 정걸이란 장수는 순신의 제자와 같은 사람이다. 충청수사 시절엔 행주幸州 싸움에 나선 권율을 원조해 공을 세운 장수였다. 어찌 됐든 그날 남해도의 관음포(경남 남해군 고현면 치면리)에 와서 밤을 지낸 순신은 그다음 날인 25일 사량 바다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만났다. 순신은 원균을 만난 자리에서 ‘경상도 연해 어디에서 적이 출몰하는가’라고 물었지만 그는 상세한 대답을 못하고 어물어물하기만 한다. 순신은 원균을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경상도 바다에서 싸우는 이상 그 관할권을 잡은 원균을 처단할 수도 없다. 더구나 같은 수군절도사로서 논죄할 처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원균은 싸울 때마다 병선이 적다는 이유로 뒤떨어져 있었다. 화살이 미치지 않는 원거리에서 싸움 구경만 하고 있다가 순신, 이억기의 군사가 이기고 나면 그제야 대들어 적선을 깨뜨리고 물에 떠도는 적병의 시체를 건져 올려 목을 베었다. 그러면서도 순신을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이는 그의 성품이 음험하고 편파적이었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까닭 없이 미워했다고 한다. 그런 원균을 전쟁에 참여시킬 수밖에 없는 순신은 답답하기 그지없었을 게다. 

8월 28일 순신이 파견하였던 정탐군이 육지 각처에 있는 적정을 염탐하고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고성·진해·창원 각읍과 진주병영 등지에 머물렀던 적병들이 전라좌수사 사또의 함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이달 24, 25일 죄다 도망쳐 부산 등지로 가버렸습니다.” 이것은 수길의 명령을 받은 적군이 험고한 항만으로 물러나 지키면서 버틸 작정이던 것이었다. 순신은 그날 아침 배를 띄워 김해·양산 두 강의 어구로 갔다. 순신의 함대가 오는 것을 본 백성들이 부모를 만난 듯이 기뻐하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그들은 제각기 적병에게 시달리던 이야기를 고하였다. 그중 창원땅 구곡포仇谷浦에서 고기잡이하는 정말석丁末石이라는 사람은 김해강에서 3일 동안이나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쳤다며 이런 말을 고했다.
“김해·양산 두강에 있던 적선이 100여척이나 되더니 최근 2~3일간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떼를 지어 몰운대 밖으로 도주하여 나갔소. 그놈들이 창황하여 소란해하는 통에 소인은 밤을 타서 도망을 해 나왔소.”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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