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달청의 이상한 규제완화

▲ 도로포장재 업계가 표준규격을 맘대로 바꾼 조달청 때문에 시끄럽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물품의 ‘단체표준’이라는 게 있다. 조합이 만드는 것으로, 조달청의 납품 기준 규격이다. 때문에 단체표준은 제정도 어렵고, 조합을 만드는 것도 까다롭다. 이름도 낯선 흙콘크리트조합. 이 조합은 ‘도로포장재’ 관련 단체표준을 갖고 있다. 그런데 조달청이 이 단체표준과 유사한 ‘품목’을 갑자기 만들어, 조합의 단체표준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조합 측은 ‘조달청의 갑질’에 농락당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부기관이 사용하는 물품 대부분은 조달청을 통해 구매된 것들이다. 혈세로 물품을 구입하는 만큼 그 절차를 투명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조달청이 공고하는 입찰에 참여하는 기업은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춰야 한다. 특히 정부기관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물품은 조달청의 ‘다수공급자계약(MAS)’ 규정에 따라 물질ㆍ성능ㆍ효율이 똑같아야 한다. 예컨대 도로포장을 어떤 기업이 하든 ‘도로포장재’는 같은 품질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조달청은 개별기업이 납품하는 제품규격을 일일이 검증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조달청은 특정제품을 만드는 기업들에 ‘규격을 검증하는 업무’를 사실상 위임한다. 기업이 모여 조합을 만들고, 그 조합에서 ‘단체표준’을 제정하면 조달청 입찰자격을 주는 거다[※ 참고: 규격을 따르는 규칙은 ‘KS>단체표준>조달청 자체 규격’ 순이다.]

물론 단체표준은 조합이 임의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국기술표준원이 제품인증 기준을 세우면 해당 조합은 회원사들이 물품을 제대로 생산ㆍ납품할 능력이 있는지 검토한다. 회원사는 최종 제품의 시험성적서까지 제출해야 조합으로부터 인증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조합의 인증활동은 기술표준원의 감독을 받는다. 단체표준이 KS인증과 더불어 표준규격의 지위를 갖는 이유다.

정부가 구매하는 ‘도로포장재’에도 단체표준이 있다. 2012년 1월 설립한 한국경관포장공업협동조합(옛 한국흙콘크리트공업협동조합ㆍ이하 흙콘크리트조합)은 2013년 4월 도로포장재로 사용하는 제품을 ‘흙콘크리트’라는 품목으로 묶은 뒤 보도용ㆍ자전거도로용ㆍ주차장용으로 세분화했다. 그후 각 용도에 따라 일반형ㆍ투수형(물이 투과되는 제품)으로 구분해 총 6개 제품의 단체표준을 만들었다. 이 단체표준은 한국표준협회 심의회를 통과해 등록이 완료됐고, 2013년 7월 흙콘크리트조합은 회원사를 위한 교육자료까지 만들어 배포했다.

 
조달청 역시 이 단체표준을 적용해왔다. 흙콘크리트조합의 단체표준이 보도용ㆍ자전거도로용ㆍ주차장용 흙콘크리트 도로포장재(일반형ㆍ투수형)를 조달청에 납품하는 기준과 요건이 된 셈이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조달청이 ‘흙시멘트’와 ‘투수콘크리트’의 표준규격을 별도로 설정한 것이다. 더구나 앞서 언급한 ‘흙콘크리트’를 조달청에 납품하려면 조합인증 등 절차가 까다롭지만 ‘흙시멘트’ ‘투수콘크리트’는 시험성적표 하나만 조달청에 제출하면 ‘(조달청) 납품’이 가능하다.

규제완화 위해 절차도 무시

당연히 흙콘크리트 단체표준을 만들어 인증을 받은 흙콘크리트조합 측이 발끈했다. 한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조달청이 제시한 입찰기준을 맞추기 위해 조합을 만들고, 단체표준을 제정했으며, 이 과정에서 상당한 비용과 노력을 투입했다. 그런데 1년도 채 안 돼 조달청 맘대로 우리의 단체표준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갑甲의 횡포라고밖에 볼 수 없다.” 조달청 관계자는 “흙콘크리트와 흙시멘트ㆍ투수콘크리트는 전혀 다른 물품이다”며 “흙콘크리트조합이 목소리를 높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다.

쟁점은 두개다. 조달청이 ‘흙시멘트’ ‘투수콘크리트’ 품목을 만들면서 흙콘크리트조합 측에 정보를 제공하고 의견을 수렴했느냐가 첫째 쟁점이다. 둘째는 조달청의 주장처럼 ‘흙콘크리트’와 ‘흙시멘트ㆍ투수콘크리트’가 다른 물품인지다. 전자는 절차, 후자는 실체의 문제다.

절차적 문제부터 따져보자. 이 사건은 지난해 2월 조달청 물품관리과가 느닷없이 ‘흙시멘트’와 ‘투수콘크리트’에 새로운 물품분류번호를 부여하면서 시작됐다. 조달청은 조달연구원에 두 제품의 규격표준화 작업에 관한 연구용역을 의뢰했고, 조달연구원은 2014년 7월 연구보고서를 내놨다. 조달연구원은 이 자료를 토대로 12월 22일 공청회를 개최했고, 2015년 1월 두 제품의 규격서를 내놨다.

하지만 이 공청회에 흙콘크리트조합은 초대받지 못했다. 조달청이 통보를 안 했기 때문이다. 흙콘크리트조합 관계자는 “조달청은 우리가 이해당사자라는 걸 뻔히 알고 있다”며 “그런데도 공청회에 부르지 않았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공청회를 마친 조달연구원은 규격서를 만들어 올 1월 16일 흙콘크리트조합에 “이의가 있으면 제기하라”는 공문 한장을 보냈다. 공청회에 참석하지도 못한 흙콘크리트조합이 발끈하고 나선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달청 관계자는 “흙콘크리트조합을 배제한 건 잘못이지만 의도적인 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다음으로 실체적 문제를 파헤쳐보자. 흙콘크리트조합의 단체표준 ‘흙콘크리트’는 일반형ㆍ투수형으로 분류돼 있다. 조달청이 새롭게 만든 품목은 ‘흙시멘트’ ‘투수콘크리트’다. 그러나 흙콘크리트조합 측은 “‘흙시멘트’는 흙콘크리트 일반형, ‘투수콘크리트’는 투수형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근거도 있다. 조달연구원의 연구보고서다.

조달연구원 측은 ‘흙시멘트’를 정의하면서 그 모양와 치수를 그림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이 그림의 내용이 흙콘크리트조합의 단체표준 규격서에 나오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치수와 허용오차, 제품을 시험하는 공시체 제작방법, 제품의 용도, 규격별 설계단면도까지 똑같다. 다른 점은 흙의 비중뿐이다. ‘흙콘크리트 일반형’은 흙이 50% 이상인 반면 ‘흙시멘트’는 90% 이상이다. 흙콘크리트조합 관계자는 “모든 기준이 똑같은 상황에서 굳이 90% 이상의 흙을 함유한 흙콘크리트 제품이 필요하면 (우리) 단체표준에 한줄 넣으면 그만인데, 무슨 이유에서 새로운 표준규격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투수콘크리트’의 표준규격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의문이다. 조달연구원이 공청회 직전 작성한 자료를 보면, ‘흙콘크리트 투수형’ 자료를 그대로 옮겨놓고 ‘투수콘크리트 규격’이라고 명시했다. 품질기준과 삽입된 이미지까지 토시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흙콘크리트와 흙시멘트, 투수콘크리트. 이 세 품목에 대한 전문가 의견은 어떨까. 건축ㆍ토목 분야의 품질시험과 관리를 전문적으로 컨설팅하고 있는 한국건설기술공사 측은 이렇게 설명했다. “흙시멘트는 연약지반을 안정화하는 공법이나 재료로 흙과 시멘트를 배합해 도로포장재로 시공하는 건 엄밀한 의미의 흙시멘트 용어에 부합하지 않는다. 더구나 흙이란 조립토, 자갈, 모래, 세립토 등을 모두 포함하므로 흙이 90% 이상이라는 건 흙콘크리트 제품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판단한다. 투수콘크리트는 투수구조만 설명할 뿐 일반적인 표준화기법에서 정하는 적용범위(용도)가 없다. 결국 적용범위와 용도, 종류, 주원료 등을 비교 검토한 결과 투수콘크리트는 흙콘크리트 투수형과 최종 제품이 사실상 동일하다.”

그렇다면 조달청이 흙콘크리트조합의 단체표준과 중복되는 품목을 따로 떼내 표준규격을 만든 이유가 뭘까. 조달청 관계자는 “흙시멘트는 흙콘크리트에 속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제품이기에 새 기준을 만들었다”며 “투수콘크리트라는 품명은 이미 2008년에 있었고, 이번에 강화된 기준의 규격을 새로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흙시멘트와 투수콘크리트 납품 업체들이 단체표준 인증을 받지 않고, 시험성적서만 받아도 납품업체로 등록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차원도 있다”고 덧붙였다.

▲ 한국건설기술공사는 흙시멘트와 투수콘크리트가 모두 흙콘크리트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하지만 이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조달청 주장대로라면 강화된 규격을 충족하는 ‘투수콘크리트’는 시험성적서만 받으면 된다. 반면 그보다 규격 기준이 낮은 ‘흙콘크리트 투수형’은 인증을 받아야 한다. 형평성이 어긋난다.

조달청 관계자가 흙콘크리트조합 측에 보낸 이메일에 조달청의 좀 더 솔직한 입장이 나와 있다. “흙콘크리트와 투수콘크리트의 차별성(재료ㆍ투수성 등)이 인정되고, 두 제품의 투수형 제품이 사용용도는 비슷한 반면 가격차이가 좀 있으며, 투수콘크리트를 찾는 수요자들은 건건마다 총액으로 구매하고 있어 나름대로 합당한 사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조달청 “인증실적 올렸으니 나눠 먹으라”

이에 대해 흙콘크리트조합 측은 “조달청이 ‘대한투수콘크리트조합(2012년 8월 설립ㆍ이하 투수콘크리트조합)’에 수혜를 주려는 듯하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흙콘크리트조합보다 늦게 설립된 투수콘크리트조합은 그동안 수차례 표준협회에 투수콘크리트 단체표준을 등록하려 했다가 실패했다. 흙콘크리트의 단체표준 내용과 비슷해서 이해당사자간 조율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투수콘크리트조합이 제시했던 투수콘크리트 표준규격은 조달연구원의 공청회 이후 발간된 투수콘크리트 표준규격서에 버젓이 기재됐다. 표준협회가 반려한 규격이 조달청 표준규격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그뿐만 아니다. 흙콘크리트조합 측이 새로운 표준규격 제정과 관련해 조달청에 항의하자 조달청 관계자는 규정과 절차대로 일을 처리하기보다는 “그동안 인증실적을 많이 올렸으니 (투수콘크리트조합과) 나눠 먹을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식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조달청의 이상한 갑질에 애먼 조합만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얘기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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