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진의 생각하는 골프

▲ 컨디션이 좋은 골퍼는 흥분상태에 빠지기 쉽다. 그렇다고 이를 억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사진=뉴시스]
싱글 핸디캐퍼라도 주말 골퍼가 3연속 버디를 잡는 건 쉽지 않다. 더구나 화이트 칼라의 골퍼에게 3연속 버디는 홀인원만큼이나 어렵다. 그럼에도 3연속 버디를 잡으면 흥분상태에 빠지기 쉽다. 뇌 속 엔도르핀이 나와서다. 8연속 버디를 기록한 조윤지가 후반에 무너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모 방송사 사장과 두명의 대기업 사장, 그리고 필자가 함께 라운드를 가졌다. 10여년 전만 해도 네 사람은 자주 라운드를 가진 가까운 사이다. 그런데 서로가 바빠 10년만에 필드에서 모였다. 이날 모임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방송사 사장은 두 대기업 사장에게 광고를 청탁하는 입장이었고, 필자는 중간쯤 됐다. ‘슈퍼 갑’과 ‘을’ 사이다. 3년 전 방송사 사장과 필자는 다른 멤버와 함께 라운드한 적이 있었다. 이때는 국장으로 ‘슈퍼 갑’이었다. 어찌나 장타에 퍼팅도 수준급이었는지 필자는 형편없이 패하고 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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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라운드는 첫 홀이 끝나는 순간 방송사 사장과 필자는 박빙, 두 대기업 사장과는 10타 이상의 차이가 났다. 과거에도 그랬다. 그런데 결과는 필자가 1위, 대기업 사장이 2~3위, 방송사 사장이 4위였다. 방송사 사장은 후반에 필자에게 이런 귓속말을 했다. “(방송사 사장이 된 뒤) 이건 골프가 아니에요. 지난 1년 동안 라운드가 끝난 뒤 목욕탕에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후딱 샤워만 하고 만찬장에서 대기해야 했다는 얘기다. 광고주와 라운드를 하다 보니 ‘꼭 져야 하는’ 비즈니스 골프가 돼버린 것이다.

문제는 이 멤버 중 기량이 가장 나쁜 대기업 사장이 전반에 연속 버디를 터뜨리면서 발생했다. “오늘 아무래도 내 생애 베스트 스코어가 나올 것 같은데!”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사장. 아뿔싸. 이후 멀리건, 웬만하면 컨시드, 러프에 빠지면 슬쩍 옮겨주는 등 필자와 방송사 사장의 필사적인 봉사에도 그는 겨우 꼴찌를 면했다.
레슨으로 돌아가자. 싱글 핸디캐퍼라도 주말 골퍼가 3연속 버디를 잡는 것은 아주 드물다. 더군다나 화이트 칼라의 골퍼라면 3연속 버디는 홀인원만큼 어렵다. 반면 프로대회에서 3연속 버디는 너무나 흔하다.

지난 5월 31일 휘닉스 스프링스CC에서 벌어진 국내 KLPGA 투어 E-1 채리티 오픈 마지막 라운드에서 조윤지가 8연속 버디를 기록해 화제를 모았다. 특히 인코스보다 까다롭다는 아웃코스에서 1번 홀부터 8번 홀까지 모조리 파 온에 1퍼트로 처리했다. 그는 9번 홀(파4)에서 1.5m 버디퍼트를 놓쳐 ‘9홀 퍼펙트’의 대기록에 실패했다.

앞서 2연속 버디를 터뜨린 사장은 “3연속, 4연속 버디도 나올지 모른다”는 흥분에 휩싸여 다음 홀 티잉 그라운드에 섰을 땐 몸과 마음이 붕 뜬 상황이었을 거다. 이에 비해 조윤지는 “7번 홀에서도 버디를 하자 스스로 놀랐다”고 말했다. 주말골퍼는 두번째 버디에서 놀라고, 프로는 7개 줄버디를 한 뒤에야 흥분했던 거다. 조윤지는 “이때 (갤러리로 따라다닌) 엄마(조혜정)의 흥분하는 모습이 보였고, 9번 홀에 가서는 가슴이 벌렁거려 진정하기 어려웠다”고 실토했다.
 
조윤지는 후반 인코스에서 전반 컨디션의 절반만 유지했어도 우승이 가능했다. 하지만 후반은 이븐파, 다시 말해 전반은 28, 후반은 36으로 무려 8타차가 났다. 되레 다른 선수들이 막판 경쟁적으로 버디를 쏟아내 조윤지는 공동 3위에 머물렀다. 여기서 2연속 버디를 한 대기업 사장과 조윤지의 공통점은 ‘라운드 전반은 근래 드물게 최고의 컨디션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톱 오브스윙과 다운블로가 가벼우면서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전율이 일 정도로 샷감도 좋았을 게다. 둘의 또 다른 공통점은 성취되는 순간 무제한으로 방출되는 뇌 속 엔도르핀을 억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약간의 속도 차이일 뿐이다. 엔도르핀, 다시 말해 모르핀은 고통을 완전히 잊고 환희로 전환하는 뇌하수체에서 분출되는 분비물이다. 오르가슴으로 치닫는 상태에서 덤덤할 수 있을까. 절대로 억제할 수 없고, 억제한다면 인간도 아니다.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골프가 멘탈스포츠라고 경계할 일도 아니다. 
이병진 더스쿠프 고문 bjlee284120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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