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68

1593년 1월 6일 평양성 전투가 시작됐다. 3일간이나 명군明軍과 일본군이 대격전을 계속하였는데 일본군이 점점 불리해졌다. 특히 이여송은 대포를 쏘고, 독연毒煙을 피워 소서행장의 군사를 죽였다. 결국 명군은 평양성을 탈환했고, 소서행장은 패주했다.

▲ 3일 동안의 싸움에 사람이 어찌 많이 죽었든지 평양성 내외에 시체가 없는 곳이 없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유성룡에게 ‘안심하라’는 인사말을 전달한 다음날 이여송은 부총병 사대수를 순안으로 보내어 조선 각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사대수는 평양에 있는 소서행장에게 군사를 보내 “천조이허화天朝已許和”는 글월을 전달했다. 명나라 조정에서 이미 화친하기를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수군이 연패한 이후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간절했던 소서행장도 평호관을 보내 환영의 뜻을 전달했다.

사대수 역시 기쁜 척하며 일본군에게 좋은 술을 많이 먹였다. 그러던 중 복병이 일시에 내달아 군사를 베어 죽이고 평호관을 무릎 꿇렸다. 그리곤 소서행장의 군중비밀을 말하라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 말을 듣지 않은 평호관은 끝내 죽고 말았다. 평호관의 군사 2명이 간신히 도망쳐 소서행장에게 상세히 보고를 했다. 깜짝 놀란 소서행장은 평양성을 지킬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는 명군이 크게 쳐올 것을 짐작하였다. 명나라 대군은 벌써 숙천肅川에 다다랐다. 순안에서 평호관을 학살하고 그가 거느린 병사 몇명이 평양으로 도망을 쳤다는 보고가 왔다. 제독 이여송은 일각을 주저할 수 없다 하여 활을 튕겨 줄을 울렸다. 이것은 곧 진군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여송은 병사 몇기만 데리고 말에 올라 내달렸고, 이내 평양성을 에워싸고 보통문과 칠성문을 쳐들어갔다.

이 전쟁의 일자는 1593년 1월 6일이었다. 3일간이나 명군과 일본군이 대격전을 계속하였는데 일본군이 점점 불리해졌다. 그러던 중 성 안을 질주하던 이여송이 탄 말이 소서행장의 군사가 쏜 탄환을 맞고 거꾸러졌다. 하지만 이여송은 용감하게도 말을 갈아 타고 군사를 지휘하여 대포를 연달아 쏘게 하고 독연毒煙을 피워 소서행장의 군사를 죽였다.

독와사란 무기를 전쟁에 사용한 건 임진왜란 때부터다. 이순신의 거북선이 독연을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하였지만 마취제만 사용해 죽이진 못했다. 하지만 이여송은 평양성에서 독화毒火, 신화神火라는 걸 피워 적군을 죽였다. 명군은 해독하는 약을 입에 물어 사상자가 없었다고 일본전기日本戰記에 기록돼 있다.

명나라 대군과 조선 군사 연합

▲ 평양에서 패한 소서행장의 군대는 한성 안에 있는 조선사람을 살육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소서행장의 군사는 이여송의 군사를 대적하지 못했다. 갈수록 뒤로 밀리더니 내성으로 들어가 장벽 구멍으로 조총을 난사했다. 이 때문에 명군의 피해가 컸고, 이여송은 군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 소서행장의 군사가 1만여명 죽었다. 소서행장은 밤중에 패잔군을 수습해 평양성을 버리고 대동강 얼음 위를 건너 달아났다.

3일 동안의 싸움에 사람이 어찌 많이 죽었든지 평양성 내외에 시체가 없는 곳이 없었다. 일본군은 1만여명, 명군은 수천명 죽었다. 조선군사도 수백명이 죽었고, 부상자도 상당하였으며, 화전과 대포에 성중의 민가가 반이나 불타버렸다. 칠성문도 대포를 맞아 무너져서 광경이 처참하였다.

유성룡은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 조방장 김경로金敬老에게 밀령密令을 내려 달아나는 적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평양을 버린 소서행장, 종의지, 송포진신, 현소 등은 패잔군 수백명을 거느리고 한성으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밥을 걸식했지만 조선 백성 중에는 그들을 모해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패장 소서행장은 평양을 벗어나 백천에 주둔한 흑전장정과 함께 군사를 거둔 후 개성으로 돌아왔다.

그다음 개성을 사수하려하는 소조천융경과 함께 황해도 일대에 흩어져 있던 군사를 거두어 한성으로 들어갔다. 평양에서 행장 등이 패배한 전말을 보고 받은 총대장 부전수가는 조선의 동서북 각도에 흩어져 있는 일본 제장을 한성으로 불러들였다. 이여송의 군사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마전麻田에 주둔한 장종아부원친, 광주廣州에 주둔한 호전씨번戶田氏繁, 영평永平의 도진의홍, 춘천春川의 도진충풍島津忠豊, 삭녕朔寧의 이동우병, 삼척三陟의 모리승신, 함흥의 과도직무, 안변安邊의 가등청정의 무리가 총대장 부전수가의 소집에 응해 한성으로 모여들었다. 선조는 평양이 회복되자 신하들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선조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찾아 평양을 회복한 인사를 하고 속히 행군하여 한성을 회복하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은 묵묵부답이었다. 5만 대군의 군량을 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선조는 하는 수 없어 유성룡을 부르라 하여 군량을 마련할 것을 정중히 부탁하였다. 유성룡은 명을 받들고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지방으로 향했다. 백설이 분분히 내리는 추운 밤에 종사관 몇명을 데리고 중화 땅을 지나 새벽이 되어 황주에 다다랐다. 밤새도록 말을 달린 것이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선조, 하지만…

유성룡은 황주에서 황해감사 유영경에게 “도내의 양미를 명군이 행군하여 오는 길에 대령하라”고 명했다.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에게는 “이빈, 고언백, 김응서, 휴정 등 군사 중에 싸움을 감당하지 못할 만한 무리로 하여금 양미를 나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대동강 하류 3현 5읍으로 배를 보내어 양미를 실어오게 하였다.

유성룡은 이렇게 노고를 무릅쓰고 계책을 다하여 군량을 마련하였다. 이여송의 대군이 개성부에 들어간 날짜는 1월 25일이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행군한 것은 실로 유성룡이 군량을 잘 마련하여 끊이지 않게 한 공이었다. 이때 평양에서 패한 소서행장의 군대가 한양에 도착했다. 그들은 평양에서 명군에게 속은 것, 명군을 도와 평양의 요로를 인도한 것이 다 조선인의 속임수라 하여 1월 24일 조선인 대학살을 시작했다.

한양에 있던 조선 사람은 살육을 당하였다. 시민, 관리 할 것 없었다. 그들이 살던 가옥도 절반 이상이나 불을 놓아 장안이 하루 동안에 초토화됐다. 죽은 사람이 10만명이 넘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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