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자 등록제 폐지 10년

신용불량자 등록제도가 폐지된 지 10년이 지났다. 하지만 신용불량자는 여전히 차고 넘친다. 신용불량자가 받는 과도한 금융적ㆍ사회적 규제도 개선되지 않았다. 370만명에 달하던 신용불량자 수가 108만명으로 줄어들었지만 이는 ‘눈에 보이는 효과’일 뿐이다. 신불자 낙인, 지워지지 않았다.

▲ 신용불량자 제도 폐지 10년이 지났지만 신용불량자의 경제활동을 막는 규제는 개선되지 않았다.[사진=뉴시스]

# 김명훈(48세ㆍ가명)씨는 2003년 직장을 잃었다. 다니던 기업이 실적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파산한 탓이었다. 김씨의 불행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다. 당장 생활비가 급했던 김씨는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로 300만원을 빌렸다. 한두달 버티고 다시 취업을 하면 금방 갚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재취업의 관문은 바늘구멍만큼 좁았다. 그러는 사이 생활비가 필요했던 김씨는 다시 현금서비스로 200만원을 빌렸다.

하지만 연 30%에 달하는 현금서비스 이자를 갚는 게 힘들어졌고 여러 개의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는 ‘돌려막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돌려막기로도 카드대금을 갚지 못해 연체가 늘어났고 어느 순간 김씨에게는 ‘신용불량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는 여느 신용불량자와 비슷한 코스를 밟았다. 제2금융을 거쳐 결국은 사채까지 빌려 썼다. 신용불량자로 낙인이 찍히자 경제활동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물며 휴대전화마저 개통할 수 없었다. 취직에도 번번이 실패했다. 김씨는 지금 일용직 노동자를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마저도 어려운 상황이다.

 
#정민준(33세ㆍ가명)씨는 취업 준비생이다. 하지만 구직을 포기한지 오래다. 정씨는 신용유의자이기 때문이다. 정씨는 학자금대출을 변제하지 못해 2008년 신용불량자가 됐고, 각종 아르바이트와 인턴 근무를 하며 1200만원에 달하는 빚을 갚고 있다. 벌써 7년째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정씨가 시중은행을 통할 수 있는 거래는 통장에 돈 넣고 찾는 입출금 서비스밖에 없다. 휴대전화를 개통할 수도, 대출을 할 수도 없다. 게다가 신용유의자라는 딱지가 취업을 막고 있는 것 같아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다.

김씨와 정씨, 신용불량자와 신용유의자 두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는 다르지만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처지에 처해 있다. 다른 게 있다면 김씨는 2005년 이전 신용불량자가 됐고, 정씨는 2005년 이후 신용유의자가 됐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정씨는 신용불량자(신용유의자) 등록제도가 폐지(2005년 4월 28일)된 이후 신불자로 전락했다. 실제로 신용불량자 등록제도 폐지 이후 달라진 건 거의 없다. 여전히 정상적인 경제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신규 대출이나 카드 발급 등 모든 형태의 신용거래를 할 수 없다. 빚을 모두 갚더라도 신용정보회사가 최대 5년까지 연체기록을 보관해 금융 거래에 제약을 받는다.

이런 과도한 규제는 신용불량자의 재기도 막고 있다는 의견이다. 대표적인 예가 신용불량자의 취업이 어렵다는 점이다. 기업이 구직자의 신용정보를 조회해 연체여부와 금융기관에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경험이 있는 지를 파악해 고용에 활용하고 있어서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신용불량자란 딱지가 결정적인 흠결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름만 바뀐 신용불량자 제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1년 금융위원회는 ‘신용정보의 이용과 보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 구직자의 신용정보를 열람하는 기업의 형사 처벌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기업이 지원자의 신용정보를 미리 알 수 없게 차단해 신용등급이 낮거나 연체금이 있는 사람도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대출→연체→신용불량→구직실패로 이어지는 악순환은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있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관련 법령 개정이 이뤄지진 않았다”며 “기업에 신용정보 열람을 자제해 달라는 협조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신용불량자의 취업 제한은 여전한 상태다. 신용불량자가 아예 취업을 포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순영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박사는 “신용불량을 이유로 취업을 제한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며 “하지만 기업이 구직자의 신용정보를 합격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는 일은 여전하다”고 꼬집었다.
 
정부는 신용불량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개인채무자를 구제하는 정부의 대책이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통계상으로 보면 등록제 폐지 이후 신용불량자의 수는 크게 감소했다. 은행협회와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신용불량자는 신용카드 대란 직후인 2003년 372만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2006년 297만5000명, 2009년 193만4000명, 2014년 108만715명 등 감소세가 뚜렷하다.

하지만 이 감소세는 별 의미가 없다. 신용불량자가 줄어든 건 등록기준이 완화됐기 때문이다. 2005년 신용불량자 등록제도 폐지 전에는 3개월 이상 연체금액이 30만원을 넘거나 3건 이상(30만원 미만)의 연체기록이 있으면 신용불량자로 등록됐다. 하지만 폐지 이후 3개월 이상 연체금액이 50만 원을 넘거나 50만원 미만 2건 이상의 연체가 있는 경우로 완화됐다. 여기에 등록된 신용불량자 정보의 보존기간이 기존의 최장 2년에서 1년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카드대란으로 급증했던 신용불량자의 기록이 대부분 삭제된 게 신용불량자수 감소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 지난해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유의자)로 등록된 인구는 108만명에 달한다.[사진=뉴시스]

이명박 정부 이후 도입된 서민금융 프로그램도 신용불량자 감소라는 ‘가시적 효과’만 키웠다. 연체된 금액이 1000만원 이하일 경우 연체금을 상환하면 신용불량자 기록이 삭제돼 신용불량자가 줄어들었을 뿐이라는 거다. 하지만 이는 빚을 다른 빚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 김영훈 바른사회시민회의 간사는 “정부의 서민금융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신용불량자가 크게 감소했다”며 “하지만 이는 신용불량에서 벗어난 것이지 채무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과도한 규제 회생 막아

신용회복위원회를 통한 채무조정(개인워크아웃) 등이 늘어난 것도 신불자 감소에 영향을 끼쳤다. 상환기간 연장 등의 채무조정을 거치면 신용불량자 정보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채무조정을 통한 신용회복지원 신청자는 2010년 이후 연평균 9만여명을 기록하고 있다. 2005년 이후 채무조정을 받은 신청자는 총 77만3594명에 달한다. 하지만 채무조정도 빚을 갚을 수 있는 기간을 연장해 준 것에 불과하다. 김순영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박사는 “가계부채가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면서 신용불량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은 되레 늘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용불량자 제도 폐지 10년 이름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그들은 여전히 신불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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