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vs 2009년 APT 화재시 안전도

▲ 1978년에 지어진 아파트가 건축 구조상으로는 최근 지어진 아파트보다 화재에 더 안전한 것으로 나타났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두 아파트가 있다. 하나는 1978년, 다른 하나는 2009년에 지어졌다. 당신은 ‘불이 났을 경우’ 어느 아파트가 안전하다고 생각하겠는가. 십중팔구 “2009년”이라고 말할 게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1978년에 만든 아파트가 훨씬 안전하다. 건축설계 자체가 ‘소방안전’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한 사실을 추적했다.

“1970년대 지은 청량리 미주아파트가 화재에서만은 요즘 아파트보다 훨씬 안전하다.” 한 소방안전 전문가 A씨의 얘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는 소방관 출신 전문가. 설마 하는 생각으로 A씨와 함께 미주아파트를 찾았다.

이 아파트는 서울 청량리역 3번 출구 부근에 있다. 지금은 없어진 라이프주택개발이라는 건설사가 1978년에 지은 아파트로 총 8개동이다. 2개동(1동과 8동)은 복도식이고, 나머지 6개동은 계단식이다. 복도식은  층별로 나눠진 복도를 따라 가구당 출입문이 있는 형태인데, 주공아파트 중에 이런 구조가 많다. 계단식은 요즘 아파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두 가구의 출입문이 마주보고 있고, 중간에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함께 있다.

먼저 복도식 아파트로 향했다. A씨는 “화재시 대부분의 인명 피해는 연기 때문”이라며 “출입문을 나서면 곧바로 외부와 연결되는 복도식 아파트는 연기에 의한 피해가 계단식 아파트보다 훨씬 적다”고 설명했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화재로 인한 인명피해의 60~70%는 유독가스 등 연기에 의한 질식이나 중독 때문에 발생한다. 나머지는 화상과 열상, 혹은 추락에 의한 사망이다.

 
하지만 복도식 아파트는 미주아파트 외에도 많다. 더구나 이 아파트는 복도 중간에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있다. 계단식 아파트보다 나을 게 없어 보였다. 그러자 A씨는 복도 끝으로 안내했다. 옥외계단이 드러났다. 그는 “예전에도 복도식 아파트는 많이 지었지만 이렇게 옥외계단이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며 “이 계단은 화재시 입주자의 대피는 물론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의 안전까지 담보해주는 확실한 대피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요즘 아파트와 오피스텔은 옥외계단 대신 완강기(몸에 밧줄을 매고 땅으로 천천히 내려올 수 있는 비상대피 기구)를 설치한다. 그러나 A씨는 “완강기를 이용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일반인은 5층 높이에서조차 공포심에 사로잡혀 발을 떼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며 “설계하자가 있는 경우도 있고, 특히 비상상황에서 사용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해 추락사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1년 경기도 한 모텔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벌인 촛불이벤트가 화재로 번졌을 때, 완강기를 타고 내려오던 2명이 모두 사용법 미숙으로 추락사했다. 

별도의 피난계단 있는가

물론 복도식 구조와 옥외계단은 화재시 유용한 대피수단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미주아파트가 더 안전하다’고 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A씨는 계단식 미주아파트로 향했다. 언급했듯 두 세대 라인별로 출입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는 요즘 아파트와 똑같은 모양이다.

그런데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 출입로의 반대편으로 건물을 돌아가 보면 두 세대 가운데 공간에서 또 다른 계단이 나온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평상시 출입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쉽게 말해 엘리베이터 뒤편에 비상계단이 하나 더 있는 구조다. 각 세대마다 발코니 옆에 비상구가 있고, 그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다[※참고 : 사진➊ 참조]. 침입 위험이 있어 1층 출구를 자물쇠로 막아 놓긴 했지만, 계단으로 통하는 발코니 벽도 불에 강한 내화벽이라서 계단 공간만으로도 충분히 대피가 가능하다. 계단 층층마다 나 있는 창에 방충망을 제외한 창호가 없는 것도 독특하다. 환기가 쉽도록 일부러 뚫어 놓은 것이다.
▲ ① 계단식 미주아파트는 발코니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피난계단을 이용해 1층까지 대피할 수 있다. ② 1971년에 지어진 여의도 초원아파트는 복도가 실내에 있지만 옥외계단을 두고 있다.[사진=지정훈 기자]

물론 발코니가 있는 요즘 아파트도 비슷한 장치가 있다. 화재시 옆집 발코니를 뚫고 들어갈 수 있도록 발코니 측면 부분에 구멍을 내고 석고 등의 재질로 막아 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 장치는 무용지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단 사생활 침해의 가능성이 있고, 침입 사고에도 취약하다. 실제로 이를 통해 옆집을 침입한 사례도 있다. 더구나 최근엔 발코니 구석을 창고처럼 개조해 사용하거나 발코니 확장 공사를 하면서 아예 구멍을 막아 놓은 경우가 많아 유사시 활용도가 떨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건물 앞에 널따란 화단을 조성하는 요즘 아파트와 달리 이 아파트(일부 제외)는 출입로 쪽도 발코니 쪽도 화단폭이 2m가 채 안 된다. 화재시 소방차가 언제든지 진입할 수 있도록 소방도로도 확보해 놓고 있다. 물론 미주아파트가 완벽한 건 아니다. 당초 이 아파트엔 스프링클러가 적용되지 않았다. 특히 복도식은 소방호스가 외부에 있어 겨울엔 동파 우려도 있다. 중요한 건 미주아파트의 소방안전시스템이 신기술이 아닌 ‘건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아파트 자체를 안전을 위해 지었다는 거다.

그럼 요즘 아파트는 어떨까. 꽤나 비싼 아파트로 손꼽히는 서초구 반포동의 B아파트를 가보자. 청량리 미주아파트가 ‘트인 구조’라면 이 아파트는 전형적인 ‘막힌 구조’다. 116㎡(약 35평)를 기준으로 볼 때 두 대의 엘리베이터와 하나의 계단실을 가운데에 두고, 4가구가 펼쳐져 있다.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가 4가구가 아닌 2가구라는 점을 빼면 기본 구조는 같다. 당연히 각 가구의 창을 통해서만 외부와 연결된다. 그 외에 별도의 비상계단은 없다.

 
이렇게 ‘막힌 구조’는 ‘최신 소방설비’에 대한 믿음으로 탄생했다. 문제는 ‘최신 소방설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설비의 오류’가 있을 때 화재가 났다고 가정한 뒤, 다시 B아파트 구조를 살펴보자. 그러면 이 아파트는 그 자체로 무덤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일단 입주자들이 임시로 대피할 공간이 없다. 내부는 연기로 가득하지만 연기가 빠져나갈 틈도 거의 없다. 

최신 소방설비는 작동 안하면 끝

요즘 오피스텔에 많이 적용되는 시스템창호를 적용했는데, 연기가 빠져나가기엔 창이 너무 작다. 더구나 대부분 ‘발코니 확장’ 구조다. 연기를 빼겠다고 창이라도 부수는 날엔 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 아래층의 불길이 위쪽으로 번질 수 있어서다.

소방안전 전문가들에 따르면 발코니는 주거공간과 외부공간의 완충 역할 외에도 아래층의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는 역할도 겸한다. 발코니에 마감재를 별도로 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덕분에 발코니는 화재시 임시 대피장소로도 쓰인다. B아파트는 이런 안전지대를 없앤 것이다. 현행 시행령에도 발코니는 ‘임시 피난공간’으로 규정돼 있다. 115㎡(약 35평) 이하는 설계 당시부터 아예 ‘발코니 확장’ 구조였다.

문제는 또 있다. 미주아파트처럼 ‘제2의 피난계단’이 없다. 게다가 전실全室(화재 시 연기가 계단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계단과 복도 사이에 두는 일정한 공간)이 없어 피난계단으로서의 역할을 못할 가능성도 있다. 박재성 숭실사이버대(소방방재학)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계단식 아파트의 계단에는 전실을 만들어야 한다. 복도와 전실, 전실과 계단 사이에는 각각 철제 문을 둬서 계단과 복도를 완벽히 분리한다. 또 전실에 바람이 나오는 방풍장치를 설치해 전실의 압력을 높여야만 불길과 연기가 계단으로 번지지 않는다(※참고 : 사진➍ 참조).”

결국 미주아파트는 소방설비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대피할 수 있지만 B아파트는 소방설비가 없으면 그 자체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 십상이다. A씨가 “미주아파트가 더 안전하다”고 말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건물의 화재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려면 소방설비가 아니라 소방안전을 고려한 건축설계가 우선이라는 얘기다. 박재성 교수는 “미주아파트가 더 안전하다는 데는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면서도 “다만 설비의 오류를 가정했을 땐 미주아파트가 훨씬 더 소방안전에 적합한 구조를 갖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 ① 미주아파트는 화단을 길게 빼지 않고, 별도의 소방도로를 둬서 화재진압이 쉽도록 설계됐다. ② 계단식 아파트의 계단이 화재 시 연기를 막을 수 있으려면 별도의 전실이 있어야 한다.[사진=지정훈 기자]
그럼 요즘은 왜 소방안전에 적합한 아파트를 짓지 않는 걸까. 첫째 이유는 돈이다. A씨는 이렇게 말했다. “건설사가 옥외계단이나 비상계단을 하나 더 놓는다고 돈이 훨씬 더 많이 들어가는 건 아니다. 문제는 계단이 들어갈 공간을 최소화하면 가구 수를 더 늘릴 수 있다. 1개 층에 한 세대를 늘렸을 때, 10층짜리 건물이라면 총 10가구가 늘어나는 셈이다. 어마어마한 득을 볼 수 있으니 건설사들은 이걸 놓치기 싫은 거다.”

“건축법에 소방안전법 넣어야”

다른 하나는 법의 이원화다. 애당초 건축물을 지을 때 건설업체가 소방안전을 고려하는 게 가장 좋다. 하지만 현행 건축법에는 이런 내용이 반영돼 있지 않다. 오히려 관련 규정은 소방안전법이 정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법체계라는 거다. 예컨대 휴게음식점이나 유흥주점 등 다중이용업소가 들어서는 건물이라면 건물을 지을 때부터 대피로를 여러개 내는 게 맞다. 하지만 대부분 건물은 다 지은 후 용도가 결정돼 비상구를 만들 공간이 아예 없을 때가 부지기수다. 그러다 보니 여러 업체의 대피로가 한곳일 수밖에 없고, 실제로 불이 나면 출구는 무용지물이 돼 인명 피해는 늘어난다. 이게 바로 2012년 9명의 목숨을 앗아간 부산 시크노래방 화재사건의 내막이다.

박재성 교수는 “건축법이 바뀌지 않는 한 소방안전법을 교묘하게 피하는 이들을 모두 규제하기란 현실적으로 힘들다”며 “소방안전과 직결된 건축법 규정을 소방안전법과 묶어 애초부터 건설사가 소방안전을 고려해 건축물을 짓도록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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