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헤지펀드의 정체성

헤지펀드 엘리엇이 삼성의 발목을 잡았다. 12년 전 소버린이 SK그룹을 흔들었던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소액주주의 반응은 다르다. 이전엔 모두 SK의 손을 들어줬던 반면 이번엔 엘리엇의 손을 들어주는 이들이 많다. 엘리엇의 논리에 타당성이 있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 헤지펀드는 투자로 수익을 낼 뿐,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6월 19일 법적 공방을 펼친 삼성물산 측 김용상 변호사(왼쪽)와 엘리엇 법률대리인 최영익 변호사.[사진=뉴시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외국계 헤지펀드는 ‘악惡의 화신’으로 통했다. 배경엔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외국계 투기성 자본의 금융시장 교란에서 비롯됐다는 기억이 한몫했다. SK그룹을 뒤흔들었던 헤지펀드 소버린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랬다.

2003년 4월, 영국계 증권사 크레스트는 SK그룹의 지주사인 SK(주)의 지분을 기존 8%대에서 단 며칠 만에 14%대로 높였다. 크레스트는 그 목적을 ‘경영참여’라 밝혔고, SK그룹의 경영 현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SK가 SK글로벌과 SK네트웍스에 자금을 지원하려 할 때는 SK 주주이익에 반한다며 반대했다.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에 연루된 최태원 회장 등 경영진에 대해서도 전면 교체를 요구했다.

SK그룹에는 비상이 걸렸다. 경영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소버린은 약 40억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4조8000억원)를 움직이는 헤지펀드였다. 당시 SK그룹의 시가총액이 약 18조원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SK그룹 경영권을 충분히 흔들 수 있었던 셈이다. 논란의 초점은 곧 ‘경영권 방어’냐 ‘적대적 M&A’냐에 쏠렸다. 일부는 소버린을 ‘기업사냥꾼’에 비유했고, “SK 주가가 오르면 막대한 이윤을 챙겨 ‘먹튀’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조세 회피지역에 설립돼 베일에 가려 있는 소버린이 SK그룹의 도덕성을 문제 삼을 자격이 있느냐는 논란까지 가세했다.

소버린과 SK그룹의 힘겨루기 결과는 SK그룹의 완승이었다. SK그룹의 우군이 많아서다. 소액주주들도 ‘외국계 투기자본’을 막는다며 SK그룹의 손을 들어줬다. 덕분에 분식회계 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받고도 2003년 9월 풀려난 최 회장은 2005년 3월 주주총회에서 보란 듯이 재선임됐다. 이후 외국계 투기자본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해야 한다는 논리는 2009년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로 이어졌다.

소버린은 손해를 봤을까. 아니다. SK 주식 매입 2년 만인 2005년 7월, 당초 가격보다 약 6배나 높은 가격에 SK 주식을 매각해 막대한 차익(약 8000억원)을 챙겼고, 소버린은 ‘먹튀’ 헤지펀드로 기억됐다.

 
12년이 흐른 지금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삼성그룹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합병하려 하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제동을 걸었다. 기존 삼성물산 주식 지분을 4.95%에서 7.12%로 높인 것이다. 엘리엇은 삼성물산 주식이 저평가됐다며 합병을 반대했다. 6월 18일에는 보도자료를 통해 “(삼성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삼성그룹 지배구조개편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지지한다”면서도 “하지만 과정에 수반되는 계획이나 절차는 모든 기업지배구조 기준을 반드시 준수해야 하고, 따라서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 또한 제대로 반영돼야 한다”고 밝혔다. 합병 목적이 경영권 승계라 해도 삼성그룹 맘대로 계열사를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다.

대기업 지배구조가 헤지펀드 먹잇감

그러자 12년 전과 비슷한 주장들이 나왔다. ‘민족자본 삼성(선)’과 ‘외국계 헤지펀드(악)’의 대결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소액주주들의 반응은 12년 전과 달리 시큰둥하다. 삼성물산이 6월 10일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추진하기 위해 자사주를 KCC(삼성물산 우호 지분)에 매각하려 할 때는 소액주주들이 삼성물산 주식 67만주(삼성물산 주식 0.43%에 해당)를 모아 엘리엇에 의결권을 위임했다.

외국계 헤지펀드를 과연 단순히 ‘악’으로 규정하고, ‘삼성을 지켜야 한다’고 하기에는 삼성에 문제가 있다는 공감대가 있다는 건데, 여기엔 몇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국내 대기업들은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순환출자구조를 통해 적은 지분으로도 수많은 계열사의 경영권을 쥐고 좌지우지하고 있다. 일례로 시가총액이 186조원에 달하는 삼성전자의 주인은 1억4729만여주를 나눠가진 주주들이다.

하지만 실제 오너는 고작 3.38%를 가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었다. 삼성전자 지분을 가진 다른 계열사의 지분을 가지고 우회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누구든 그보다 많은 주식을 얻으면 경영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헤지펀드의 좋은 먹잇감이다. 이런 구조를 대기업 스스로 만들어 놓고 경영권 방어 운운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다른 이유는 삼성은 이미 국내 대기업이 아닌 글로벌 기업이라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애플과 맞짱을 뜨는 세계 1위 전자기업이다. 다양한 주주들이 있고, 이들은 충분히 그들의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다. 현재 삼성전자는 외국인 지분 비율이 51%를 넘는다.

헤지펀드들이 보여준 긍정적인 성과들도 분위기 반전에 기여했다. 기업의 경영에 참여해 해당 기업의 가치를 현재보다 높여 차익을 실현하는 건 헤지펀드의 전형적인 전략이다. 흔히 ‘행동주의 펀드’라 불리는데, 새로운 건 아니다. 사실 헤지펀드는 애초부터 소규모 조직으로 움직이면서 해당 국가와 기업의 전략에 따라 전략을 수시로 바꾸는 유연성을 갖고 있다. 단기 투자가 적격인 곳에는 단기 투자를, 행동주의 전략이 적격인 곳에는 장기 전략을 취한다는 거다. 물론 헤지펀드는 돈을 벌기 위해 한 국가의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업과 주주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많다.

 
일례로 그린라이트 캐피털은 2013년 애플에 “현금을 쌓아 놓고 배당을 하지 않는다”며 소송을 했고, 결국 애플은 배당을 늘렸다. 올해 칼 아이칸은 애플의 자사주 매입을 관철시켜 애플의 주가를 올렸고, 이베이에는 전자결제 사업부인 페이팔을 분사하도록 유도했다. 당연히 헤지펀드들의 이런 요구는 순전히 수익 창출 목적에서 이뤄진다. 중요한 건 제3자의 시각에서 기업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해 기업에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는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거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헤지펀드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삼성 바뀌지 않으면 비용 커질 것”

문제는 국내 기업들은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변화의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상조 한성대(무역학) 교수는 “자본주의의 룰대로 돈을 쫓아가는 헤지펀드를 어떻게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있겠는가”라며 이렇게 말했다. “헤지펀드에 대가를 치른 후에라도 바꿀 부분이 있으면 바꾸고 변해야 하는데 국내 대기업들은 여전히 헤지펀드를 선과 악으로 이분화하는 데 급급하다. 하지만 헤지펀드는 선도 악도 아니다. 투자가 결과를 결정지을 뿐이다. 삼성의 지상목표가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승계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지 않나. 그런데 삼성은 이를 부인한다.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승계과정을 주주들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단 한번이라도 거친 적이 있는가. 거기에 주주들이 반발하는 거다. 엘리엇은 이를 이용해 삼성을 공격하는 거고 그 빌미는 삼성이 제공하고 있다. 그럴수록 삼성의 비용은 커질 수밖에 없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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