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75

이순신은 3도 제장과 더불어 산과 바다에 맹세한 게 있다. “적의 노 하나, 갑옷 조각이라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 귀로를 끊어버리겠다”는 맹세였다. 하지만 명나라 병사의 소식은 묘연하여 알 수 없고 우리 육군엔 장수다운 이가 없어 모든 적군을 섬멸하기 어려웠다.

▲ 분이 치밀어 오른 풍신수길은 이렇게 명했다. “일본제장들이여! 진주성만은 도륙해 분을 풀어라.” [사진=더스쿠프 포토]
순신의 함대는 선창에 열박하고 있는 적선에 공격을 선언했지만 소서행장은 이순신의 위세를 무서워하여 바다로 나오지 못했다. 5·6척의 배로 포구 경계 안쪽으로 못 들어오게 하다가 항구 안으로 들어가는 일을 반복했다. 순신은 그날 밤 이억기 이하 제장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내일의 전략을 토의하였다. 순신은 이렇게 분부했다.

“일본 수군이 우리 함대를 두려워하여 감히 나와 항전하지 못하고 시종일관 험지에 의거하여 배를 감추고 있으니 실로 섬멸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포구 안을 조사한즉 전선 7·8척은 가히 들어갈 만하니, 내일은 그렇게 해보라.” 이튿날 아침, 이순신 함대의 15척은 적선 다수가 열박 중인 포구 안을 번갈아 들어가 ‘지현자 대포’를 쏘아댔다.

그 결과, 적군 중에선 사살된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자기의 휘하인 삼혜와 의능의 승군 등에게 명하여 동쪽 안골포, 서쪽 제포에 진을 치게 했다. 이는 수군의 육전대나 다름 없었다. 일본 군사들은 이순신 함대가 육지로 상륙하는 걸 보고, 동·서쪽으로 퍼져 대응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동·서쪽엔 삼혜와 의능의 승군 등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일본군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순신은 이 싸움에 사도첨사 김완, 우별도장 이기남, 판관 김득룡金得龍 등을 증원부대로 참가시켜 적군에게 큰 타격을 줬다. 또한 웅천의 수군 이준련李準連, 양민 여인 매염梅艶 염우廉隅 윤생允生, 김해의 양민 여인 김개金介, 거제의 양민 여인 영화永化 등을 구해냈다. 포로로 잡혀 있던 우리 양민들은 이렇게 말했다. “최근 이순신 장군의 군사와 접전한 이래로 화살과 대포의 철환에 맞아 중상을 입은 자가 부지기수고, 죽은 자도 많았소. 또 올해는 정월 이래로 전염병이 적군 중에 크게 돌아 날마다 죽는 자가 끊이지 않았소.”

포구에 숨은 일본군 패퇴

▲ 2차 진주대첩의 기운이 감돌았지만 조선 장수들은 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윽고 이순신은 한산도를 향하여 승전고를 울리며 회군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이순신은 군사를 가다듬어 웅천의 소서小西, 협판脇坂, 관야菅野 등 적의 주둔지로 진격하였다. 이를 감지한 적군은 깊은 항만 속에 배를 숨기고 이순신의 수군과는 싸우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순신 군사가 종일 밀어붙였지만 적은 포구 안에 숨어 나오질 아니한다. 그래서 이순신은 포환과 시석으로 형세를 갖추고 좌우에 있는 산록의 포대를 비격진천뢰로 쏘았다. 적진 한복판에서 진천뢰가 터지자 사상자가 무수하였다. 그러나 적은 육지에 있고 우리는 배에 있어서 수급을 벨 수는 없었다. 이 싸움에 경상도 복병장伏兵將이 적군 2명을 생포하여 왔다.

참고로 비격진천뢰라는 무기는 박진보다 이순신이 먼저 사용하였다. 사용 연월일자를 보면 그러하다. 독자는 국사와 충무전서를 고찰한 뒤 스스로 판단하면 된다. 영진무 공대원은 일본말을 잘하기 때문에 순신의 명령을 받아 생포하여 온 적군 2명을 문초하였다. 한명은 송고로宋古老, 다른 한명은 요사여문要沙汝文이었다. 하지만 둘의 진술 내용이 신뢰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번복이 많아 목을 베어버렸다.

이순신은 3도 제장과 더불어 산과 바다에 맹세한 게 있다. 적의 노 하나, 갑옷 조각이라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 귀로를 끊어버리겠다는 맹세였다. 하지만 명나라 병사의 소식은 묘연하여 알 수 없고 우리 육군엔 장수다운 이가 없어 모든 적군을 섬멸하기 어려웠다. 이순신은 이를 “한탄할 일”이라고 기록했다. 이 무렵, 진주성에선 풍신수길의 명령을 받아 넘어온 군사 2만명이 김시민의 전략에 참패을 당했다. 일본무사의 위신이 경상도 연안에서 육지와 물에서 꺾였다 하여 크게 노한 풍신수길은 이런 명령을 내렸다. “일본 제장이 경상도 연해안으로 모였으니, 진주성만큼은 도륙하여 분을 풀어라.”

풍신수길의 진주성 공격 지시

그렇게 되어 총대장 부전수가, 모리휘원의 지휘로 10여명 장수가 6만 대군을 거느리고 수륙병진하여 진주성을 목표로 쳐들어온다. 진주성 안에는 충청병사 황진, 진주우병사 최경회,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진주목사 서예원,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사천현감 장윤張潤,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 등 여러 장수가 모여들었다.

군사는 2만, 백성은 남녀노소 4만이 있었고, 군량은 수만석으로 넉넉했다. 특히 황진은 용맹이 3군에 으뜸이 되는 유명한 장수였다. 이때 도원수 김명원, 순변사 이빈, 전라감사 권율, 방어사 선거이 등 여러 장군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을 돕기 위해 함안군에 진을 쳤다. 진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적의 선봉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의 군사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달아나기를 잘하는 김명원이 맨 먼저 도망쳤고, 이빈도 날쌔게 사라졌다. 권율의 군사도 싸울 용기를 잃어버려 달아났다. 선거이는 제일 나중에 뒤를 담당하여 싸우면서 물러나 강을 건너 의령현으로 퇴각하였다. 의령 땅으로 물러난 제장들은 진주성을 구원할 군사회의를 개최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