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행의 재밌는 法테크

▲ 임대차계약서에 임차인의 물건 반출 조항을 적는 경우가 있어 분쟁이 우려된다. [사진=뉴시스]
21세기 들어 빌딩 공급량은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공실도 증가했다. 아울러 부도 등으로 임대료를 연체하는 임차인이 늘어나면서 임차인과의 분쟁이 늘어났다. 특히 임대인의 재산 강제 반출이 논란이다.

지금은 중학생인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얘기다.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의 장래희망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경찰, 축구감독, 의사 등이 나왔다. 그런데 한 친구의 장래희망 때문에 모두가 웃었다는데, 그건 ‘빌딩관리’였다. 빌딩 주인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그렇게 표현했으리라.

필자의 친구 중에 ‘빌딩관리’를 하는 이가 있다.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는 모양이다. 빌딩의 공급량은 크게 늘어난 반면 공실도 덩달아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 친구가 간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내용은 이렇다. “빌딩에 세 들어 있는 업체가 최근 사업이 어려워져서 사실상 부도가 났다. 여러 달 월세를 내지 않아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다. 이제는 임대보증금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알아서 나가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으면 명도소송을 해야 하는데, 막상 소송을 하자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물었다. “임대차계약서에 ‘임대차계약이 만료되거나 임차인이 임대료를 연체해 계약이 해지된 경우 임대인이 임차인의 물건을 임의로 반출할 수 있다’는 문구가 있는데, 이를 근거로 임차인의 물건을 빼내면 안 되는가.” 필자는 임대차계약서에 이런 문구를 포함된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와 비슷한 대법원 판례를 찾아냈다.

A씨는 자신 소유의 빌딩 1층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던 B씨가 임대료를 연체해 임대차계약이 종료됐음에도 명도를 거부하자 간판업자를 시켜 강제로 간판을 떼어내고, 점포 출입문에 자물쇠를 채워 버렸다. 임대차계약서에 ‘임대차계약의 종료일 또는 계약해지통보 일주일 이내에 임차인이 소유물과 재산을 반출하지 않은 경우 임대인은 임차인의 물건을 임의로 철거·폐기처분 할 수 있으며, 임차인은 개인적으로나 법적으로 하등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A씨는 음식점 영업을 방해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는 벌금 50만원의 선고유예판결을 받았다. 억울했던 A씨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은 어떻게 결론을 내렸을까. 판례를 보자. “강제집행은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사법권의 한 작용이다. 채권자는 국가에 강제집행권의 발동을 신청할 수 있는 지위만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채권자가 임의로 강제집행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의 계약은 무효다.” 결국 대법원은 A씨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강제집행 권한을 국가에 맡기고 개인에겐 인정하지 않는 건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다. 임대인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강제집행 권한’ 등이 명시된 조항을 임대차계약서에 삽입하면 임차인의 지위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임차인이 월세를 연체했을 때 임대인이 계약서를 근거로 물건을 반출하거나 철거·폐기하려 하면 임차인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에 따라 대법원의 견해는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친구에게는 번거롭더라도 법의 테두리 내에서 국가의 도움을 구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조언했다.
조준행 법무법인 자우 변호사 junhae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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