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매운동 약발 없는 이유

▲ 롯데그룹의 불공정 경영형태가 드러나면서 불매운동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사진=뉴시스]
남양유업의 ‘갑질 사건’을 기억하는가. 협력업체 직원에게 반말과 폭언을 했던 그 사건이다. 우리의 뇌리에선 잊힌 사건이지만 이 회사를 향한 불매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남양유업의 제품을 사지 않겠다’며 불매를 외쳤던 소비자들이 하나둘씩 현장을 떠났을 뿐이다. 우리 불매운동은 왜 이리 힘이 없을까.

# 일본의 유제품 제조기업. 1925년 설립된 이 기업은 한때 일본에서 8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며 승승장구했다. 연 매출이 1조3000억엔(약 13조원)에 달할 정도였다. 그런데 2000년 6월 일부 소비자가 이 회사 우유를 마시고 식중독에 걸렸다. 해당 기업 CEO는 “해당 우유와 식중독의 연관관계는 증명된 바 없다”며 “제품에는 문제가 없다”고 발뺌했다. 그럼에도 식중독 환자가 1만4000여명까지 늘어나자 보건당국은 강제리콜을 명령했다.

이 기업 CEO는 그제야 “공장의 기계 하나가 바이러스에 감염됐지만 그 기계는 이미 가동 중단했다”며 “안심하고 우리 제품을 계속 이용해 달라”고 해명했지만 이 역시도 거짓말이었다. 문제의 기계가 계속 돌아가고 있다는 게 방송을 통해 보도됐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분노했고 일본 전역에서 불매운동이 펼쳐졌으며, 이 회사는 부도를 피하지 못했다. 불매운동에 무너진 이 기업은 스노우 우유로 유명한 유키지루시 유업이다.

# 연간 5조~6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미국의 장난감 제조기업. 1945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2007년 위기를 맞았다. 중국에서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생산ㆍ판매한 장난감에서 기준치 이상의 납성분이 검출돼서다. 불매운동의 움직임이 일자 회사엔 비상이 걸렸다. 하지만 이 기업의 CEO는 침착했다. 그는 “4명의 아이를 가진 아빠로서 부모들이 얼마나 안전한 장난감을 원하는지 잘 안다”며 “부모로서 추가적인 문제가 발견된다면 어떤 작은 문제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납성분이 들어간 인형 때문에 이미지가 추락한 중국 장난감 협력업체들에도 자청해서 사과했다. 아울러 100만개가 넘는 문제의 장난감은 적극적으로 리콜했다. 그러자 불매운동의 불씨는 금세 꺼졌고, 오히려 ‘안전한 장난감 브랜드’라는 인식을 얻었다. 이 회사는 지금도 꾸준히 바비인형으로 소비자의 사랑과 신뢰를 얻고 있는 마텔이다.

불매운동의 성과, 기업에 달려

불매운동의 파급력을 잘 보여주는 대조적인 예다. 불매운동이 기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거다.일부에서 “불매운동이 함부로 진행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불매운동은 자칫 애먼 피해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잘못된 오해가 불거져 불매로 이어지는 경우, 해당 기업의 직원들과 협력업체에 피해가 미칠 수 있다는 거다.

 
사례를 보자. 과거 국내의 한 라면업체는 라면을 튀기는 데 특정 기름을 썼다는 이유로 소비자들에게 외면을 당했다. 하지만 이 기름은 당시 경쟁업체에서도 쓰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기름이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지 정확한 조사가 이뤄진 적도 없었다. 언론에서 해당 기업이 거론된 게 전부였다.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던 이 라면업체는 결국 경쟁사에 1위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믹스커피 시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 있다. 한 유가공업체가 “몸에 안 좋은 특정 성분(카제인나트륨)을 뺐다”고 광고를 하자, 이 업체로 소비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연히 경쟁업체는 영문도 모른채 실적악화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카제인나트륨이 몸에 실제로 좋지 않은지는 검증된 적 없다.

두 사례 모두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의해 소비자 선택이 제약을 받은 것인데, 이런 상황이 불매운동으로 이어진다면 해당 기업은 애먼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전미영 서울대(소비자학) 교수는 “불매운동은 기업을 변화시키는 데 꽤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며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다는 올바른 정보를 바탕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롯데그룹 3부자의 경영권 다툼으로 베일에 싸여 있던 불공정한 경영행태들이 속속 드러나자, 소비자들이 분을 표출하고 있다. 자발적인 불매운동에도 불씨가 붙은 지 오래다. 특히 롯데 계열사의 주가 하락으로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이 손실을 입자 ‘불매운동’의 불길은 빠르게 확산되는 추세다. 금융소비자원을 시작으로 참여연대와 소상공인연합회를 비롯해 다양한 시민단체까지 가세했으니, 불길의 파급력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불매운동이 롯데그룹을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각종 불매운동은 기업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전에 불씨가 꺼진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2007년 벌어진 ‘홈에버(현재 홈플러스) 불매운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부당해고로 출발했지만 그들의 처우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주인이 바뀐 홈플러스가 고객정보를 팔아 또 한번 불매운동의 대상으로 지목된 건 우연이 아니다. 

▲ 홈플러스에서 또 소비자를 기만하는 사건이 일어난 건 예전의 불매운동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해서다.[사진=뉴시스]
냄비근성 가득한 한국의 불매운동

2013년 있었던 남양유업 불매운동도 일부 성과는 있었지만, 남양유업의 ‘진정성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물량 밀어내기’ 사건 이후 경영진이 90도로 허리 숙여 사과한 게 불과 2년 전인데, 최근엔 급식 우유 납품을 위해 자금력을 앞세워 제살 깎아먹기식 덤핑입찰로 시장을 흐려놓고 있다. 결국 우리나라의 불매운동은 기업을 변화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거다.

해외는 다르다. 문제를 일으킨 기업이 불매운동을 계기로 지속가능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예는 수없이 많다. 대표적인 기업은 나이키다. 나이키가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오른 덴 불매운동이라는 초석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1996년 12살짜리 파키스탄 소년이 나이키 축구공을 실로 꿰매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소비자들은 아동노동 착취를 비판하며 불매운동을 벌였다. 나이키는 이를 계기로 지속가능경영의 길을 열었다.

스타벅스 역시 1990년대 공정무역 원두 사용요청을 거절하다가 불공정무역과 개도국 농가 착취 문제로 불매운동의 후폭풍을 맞았다. 이후 공정무역 커피비중을 높이며 현재의 스타벅스 브랜드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불매운동이 가진 힘을 잘 사용하면 기업과 소비자가 함께 윈윈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윈윈 가능한 양날의 검

그러기 위해선 몇가지 전제가 있다. 문저 소비자가 바뀌어야 한다. 한번 시작한 불매운동은 원인이 제거되거나 개선될 때까지 지속적이고 꾸준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롯데불매운동을 촉발한 금융소비자원이 “롯데가 진정성을 갖고 변하지 않는 이상 불매운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초강수를 둔 건 의미가 크다. 물론 쉽지는 않다. 소비자들은 결집이 잘 되지 않는다는 단점 때문이다. 전미영 교수는 “소비자는 일반적으로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존재”라며 “불매운동 이후 기업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도 지속적인 불매운동이 어려운 이유”라고 지적했다.

이해관계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소비자의 행태도 문제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원장은 “그동안 한국에서는 편법을 쓰고 제밥그릇을 챙기는 이들이 득을 봐왔다”며 “그러다보니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불매운동은 힘을 잃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소비자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는 거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과거 삼성불매운동을 주도했던 김상봉 전남대(철학) 교수는 “불매운동은 필요악”이라며 말을 이었다.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니까 소비자가 나서는 거다. 소비자도 제 할 일이 있는데,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는 게 정상인가. 불매운동이 일어나는 건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를 떠나서 경제질서가 바로 서 있지 않다는 의미다. 소비자는 어차피 소비를 해야 하는 처지다. 불매는 소비자가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다. 불매운동이 어려운 이유다. 만약 경제 영역에서 법치가 잘 돼 있어서 독과점적 지위를 갖는 기업도 없고, 대체할 제품이 많다면 불매운동이 아니라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을 따라가면 그만이다.” 소비자 주도의 불매운동은 정부의 무능을 방증한다는 거다. 정부가 기업의 불공정행태를 제대로 규제하면 굳이 소비자들이 나설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다. 

최대의 설득력은 진정성

불매운동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 정부의 역할은 그만큼 크다. 남양유업이 불법적인 물량 밀어내기를 자행해 124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고도 소송을 통해 119억원을 돌려받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매운동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기업의 시각 역시 바뀌어야 한다. 언급했듯 일본의 유키지루시 유업과 마텔의 사례에서 처럼 기업의 대처방법에 따라 결과는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진정성을 갖고 소비자들을 공략한 마텔은 신뢰를 받는 기업이 됐지만, 소비자를 속이려 했던 유키지루시 유업은 시장에서 퇴출됐다. 불매운동을 기회로 인식하느냐 위기로 인식하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 거다.  여기에 진정성만 더하면 얼마든지 기회로 만들 수 있다. 김형철 연세대(철학) 교수가 CEO들을 대상을 한 강연에서 “최대의 설득력을 갖는 무기는 바로 진정성”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불매운동을 마주한 롯데그룹 경영진이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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