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일의 다르게 보는 경영수업

▲ 1993년 8월 전격 시행된 금융실명제는‘절반의 성공’에 그쳤다.[사진=뉴시스]
1993년 김영삼 정부의 ‘실명화 정책’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를 아는가. 물밑에서 흐르는 정보가 나쁘게 활용돼서다. 그렇다. 정보는 ‘야누스의 얼굴’과 같다. 잘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되지만 악용하면 그 피해가 상상을 초월한다.

정보의 가치는 개인ㆍ기업은 물론 국가마저 계산하기 어려울 만큼 무한정하다. 문제는 가공할 정보력을 나쁜 목적으로 활용할 때 더 크고 극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좋은 뜻으로 활용할 땐 대개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보는 역설적이기도 하다. 요즘 ‘나쁜 의미의 국정원’이 비난의 화살을 맞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자! 정보력이 끼친 최악의 사례를 살펴보자. 필자(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김우일)가 기획조정실에서 겪은 실제 이야기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은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던 ‘가명예금제도’를 없애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참고: 당시만 해도 가명ㆍ실명에 관계 없이 은행 거래가 가능했다.] 모든 부패ㆍ비리자금이 가명계좌를 통해 늘어났기 때문이다. 홍길동, 성춘향, 임꺽정, 이몽룡 등 많은 가명을 이용해 비자금을 관리한 필자의 책상서랍 안에 주인 없는 목도장이 가득했을 정도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가명예금제도’를 없애는 국가적 사업을 포기했다. 대신 가명계좌의 금리를 없애는 정책으로 체면치레만 했다.

그렇게 몇년이 흘렀고,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과천정부청사에선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경제기획원 금융정책과, 재무부 은행과, 재무부 세제실에 근무하는 핵심 공무원들이 동시에 보이지 않은 것이다. 인맥을 동원해 확인해 보니 “6개월간 해외출장을 갔다”는 답이 되돌아왔다. 핵심 공무원의 동시 해외출장이라? 이들을 수년째 봐왔지만 장기해외출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직책의 공무원들이었기에 의혹이 생겼다. 이들의 주소를 파악해 주변을 탐문해 보니, 해외출장을 간 게 아니었다. 가끔씩 밤에 들러 옷가지를 챙겨서 돌아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실제로 공항에 알아보니 출국자 명단에도 없었다.

필자를 포함한 대기업 관계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새롭게 출범한 정부가 은밀하게 무언가를 구상하고 있는 게 틀림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를 포함한 5대 그룹 직원들은 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놀랄 만한 결과를 얻어냈다. 은밀한 계획의 골자는 특정 일시를 기준으로 예금과 인출을 동결하고 실명화한다는 ‘긴급명령’의 제정작업이었다. 실명화가 안 되면 세금으로 환수한다는 추가적 계획까지 입수했다. 이 정보를 파악한 5대 그룹과 큰손들은 자금을 빼서 또 다른 ‘실명계좌’로 발빠르게 옮겨놨고, 얼마 후인 1993년 8월 김영삼 정부는 실명법 긴급명령을 발표하고 예금을 동결했다.

하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주요 그룹과 큰손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속칭 ‘피라미’만 걸려 들었다. 이들이 빼돌린 금액은 수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짐작됐고, 김영삼 정부의 실명화 정책은 ‘지하자금’을 양성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정보는 이중적이다. 때론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주기도 하지만 나쁘게 활용되면 큰 손실을 줄 수도 있다. 우리가 ‘국정원 해킹사건’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우일 대우M&A 대표 wikimokg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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