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79

임진란 유민들에게 이순신은 ‘보금자리’나 다름없었다. 백전백승하는 이순신 부대 따라다니는 게 천하 제일의 안전한 피난처였던 거다. 그만큼 적병과 토적이 천하에 가득하여 심산유곡이라도 아니 간 곳이 없었다. 이순신 부대를 찾는 유민들이 갈수록 늘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유민에게는 백전백승하는 이순신 부대를 따라다니는 것이 제일 안전한 피난처였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1593년 10월 선조는 유성룡을 다시 영의정에 올리고, 곽재우를 성주목사로 제수해 본도 조방장을 겸임케 하였다. 이전 성주목사 제말은 본래 고성현의 사람으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해 전공戰功이 정기룡, 곽재우 이상이었다. 그래서 성주목사가 됐는데, 한양에서 내려오는 적의 대군과 맹렬히 싸우다 전사했다.

선조는 또한 도원수 김명원을 면직하고 권율을 새 도원수를 삼았다. 이정암은 권율을 대신해 전라감사로 제수하였다. 일본군은 울산·부산·양산·김해·웅천의 여러 고을 항만에 근거지를 만들고 병선을 깊은 포구 안에 들여놔 이순신 부대의 예봉에 대비했다. 때때로 쾌속선을 수십척씩으로 나눠 달밤이나 안개 낀 날 한산도 앞바다를 지나 어민에게 상해를 입혔고, 이 소식은 이순신에게 들어갔다.

이순신은 추격대를 두 갈래로 보내어 소탕케 하고 비밀리에 착포량목(판데목 등과 같은 말)을 흙으로 막아 육지와 연결, 적의 통로를 차단하여 버렸다. 이 착포량목은 만조시가 되면 중소선 정도는 통행할 수 있었던 운하지대였다. 아니나 다를까. 적의 소함대 20여척이 10월 달밤 조수를 이용하여 조선군이 지키는 견내량목을 넘어와 착포량목으로 향하였다. 적군은 물목이 막힌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던 조선 수군은 견내량에서 놓아두었다가 착포량목 부근에서 뒤를 엄습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적군은 착포량목까지 도망쳤지만 이에 웬걸, 물길이 막혀 있다. 형세가 궁박해지자 적군들은 막힌 곳을 파고 달아나려 애를 썼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치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제장들은 적군의 절반 이상을 무찌르는 데 성공했다. 적선 역시 반수 이상 깨뜨렸다. 남은 적군은 조총과 기타 군기를 수없이 버리고 겨우 4~5척의 남은 배를 타고 살아 넘어갔지만 죽은 군사가 무수하였다. 순신은 군을 거두어 동방이 밝은 뒤에 회군하였다.

기다리다 일본군 엄습

▲ 명나라 조정에서는 응징설과 허화설이 엇갈렸다. 일본군을 은근히 두려워하던 무리들은 허화설을 주장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후 이순신은 군사를 지휘하여 착량목에 판교를 놓아 백성의 통행을 편하게 하고 또 착량과 마주보는 해안인 해평海坪평야에 농장을 신설해 유민을 자리잡게 하였다. 해평평야는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지세가 평탄하고 토질이 비옥하였다. 이 평야에 관개사업을 개시하여 미륵산彌勒山 용동수龍洞水를 끌어와 유민을 농사짓게 하였다. 대개 유민이란 임란 당시에 피난하여 다니는 수천호의 백성들이었다.

이들에겐 백전백승하는 이순신 부대 따라다니는 게 천하에 제일 안전한 피난처였다. 그만큼 적병과 토적이 천하에 가득하여 심산유곡이라도 아니 간 곳이 없었다. 각처에 떠도는 백성들은 이 안전지구(이순신 부대)로 바퀴살 모이듯 모여들었다.

초창기엔 식량이 부족했지만 농사를 지은 뒤엔 군민이 다 풍족하였다. 그 때문에 순신이 유진한 곳곳마다 마을이 생기고 도시가 생긴 거였다. 한산도로 모여 들었던 유민 중 상당수는 해평농장으로 옮겨가게 하고, 군관 중에서 농사 감독을 정해 백성의 편익을 돌보게 했다. 착량묘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임란 당시 유민들과 그 자손들이 이순신의 은택을 영원히 잊지 못해 착량도에 초묘草廟를 짓고 기나긴 세월에 추모봉사追慕奉祀하였고, 그 풍속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만큼 유민들에게 이순신은 왕 같은 존재였을지 모른다.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은 심유경의 진언을 믿고 일본과 외교적 화의를 개시하기로 했는데, 나름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의 풍신수길은 노쇠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대명의 사정에도 어두웠다. 조선과 명나라를 때려 부수겠다는 야심은 있었지만 그 부하 제장들은 대부분 전쟁을 더 이상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가등청정의 일파만 풍신수길의 뜻을 받들어 실행코자 하였지만 그 세력이 소서행장에 미치지 못했다.

이보다 먼저 심유경은 소서비탄수라는 일본장수를 청화請和 사절로 데리고 북경에 들어가 일본과 강화조건을 밝혔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즉 성조成祖 때에 족리 장군을 일본왕으로 봉작하던 전례에 의하여 풍신수길을 일본왕으로 봉하여 마음을 만족케 하여 전쟁을 멈추게 할 것, 해마다 조공하기를 허락할 것” 등이었다. 소위 봉封과 공貢의 두 조건이었다.

조선·명 사정에 어두운 풍신수길

일본측이 제출한 두 조건에 대해 명나라 조정에서는 ‘응징설’과 ‘허화설’이 있었지만 일본군의 전투력을 내심 두려워한 무리들이 화의해야 후환이 없으리라 생각해 결국 허화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봉封’은 상관없지만 ‘공貢’은 불가하다는 설이 유력했다. 풍신수길을 봉왕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조공을 허락하면 일본 관민들이 해마다 명나라 지방에 출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백해百害가 있고 일리一利가 없다는 게 명나라 조정의 생각이었다. 이러하여 ‘허봉許封 불허공不許貢’으로 조정의 논의가 결정되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책봉 정사로 개구리 잘 먹는 임회후臨淮侯, 이종성李宗城을, 부사로 양방형楊方亨을 일본으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심유경은 석성에게 많은 기밀비(일본측의 요인을 매수할 돈)를 받아서 이종성의 일행을 따라 한양에 도착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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