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일의 다르게 보는 경영수업

▲ 정권의 힘으로 성장한 대우조선이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사진=뉴시스]

대우조선해양이 또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부실을 은닉해 실적을 부풀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어서다. 대우조선은 위기때마다 정부의 힘으로 뱃고동을 다시 울렸다. ‘주인 없는 회사’ 대우조선, 변화가 필요하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 국영 기업인 대한조선공사를 떠안은 남궁련씨는 거제도 옥포에 당시로선 최대 규모인 조선소를 건설했다. 그러나 무리한 건설로 인해 자금이 악화됐고, 결국 산업은행에 경영권을 넘겨줬다. 어마어마한 투자건설비를 감당할 수 있는 기업은 재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40대의 젊은이 김우중밖에 없었다. 섬유를 비롯한 경공업 수출로 해외시장에 진출한 김우중은 중후장대 산업, 다시 말해 선박ㆍ플랜트 등을 육성해야 우리나라가 부흥된다고 여겼다. 이런 생각은 박정희 정부와 맞아떨어졌고, 금융 지원을 받아 대한조선공사를 전격 인수했다. 이른바 ‘1차 수술’, 대우조선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1987년 조선경기가 불황의 늪에 빠지자, 대우조선은 다시 위기를 맞았다. 만약 대우조선이 부도가 난다면 하청업체 3000여개의 줄도산으로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국민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했다. 이번엔 김우중과 노태우가 머리를 맞댔다. 정부 측은 2500억원에 달하는 금융 지원을 결정했다. 또한 옛 토지공사가 2000억원 상당의 ㈜대우가 보유하고 있던 부산 해운대 매립지를 매입해줬다. 여기에 대우그룹은 대우조선과 대우중공업(당시 상장회사)을 합병해 대우조선을 상장시켰다.

 
보유 부동산도 매각했고, 유상증자 2000억원을 실시하는 등 맞장구를 쳤다. 그 결과, 대우조선은 힘찬 고동을 다시 울리는 데 성공했다. 필자(전 구조조정본부장 김우일)가 있었던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은 무려 2년 동안 거제도에 머물러 ‘마른 수건도 짜내는 식’의 원가관리책을 실시하는 등 대외공신력을 키우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것이 대우조선의 ‘2차 대수술’이다.

하지만 폭풍은 끝나지 않았다. 1997년 시작된 외환위기와 김대중 정부의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대우조선은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특히 연 30%의 금융 고금리는 대우조선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더구나 장치설비산업인 대우조선은 막대한 차입금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정적 파급효과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대우그룹은 붕괴됐고, 경영권이 정부에 넘어갔다. 대우조선엔 전체 공적자금 26조원 중 6조원이 투입됐고, 산업은행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3차 수술이었다.

그러던 2013년 조선업황이 극심한 부진에 빠졌다. 글로벌 경기가 위축돼서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모두 막대한 충당금을 계상하면서 누적적자가 불어났다. 공교롭게도 대우조선만 ‘흑자행진’을 기록했다. 하지만 업종의 풍향과 경쟁업체의 실적과는 다르게 가는 대우조선에 의혹의 눈길이 쏠렸고, 결국 부실을 은닉해 실적을 부풀린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대우조선은 산업은행의 주도로 실사와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네번째 수술’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대우조선이 수술대에 수차례 올라간 이유는 무엇일까. ‘주인 없는 회사’가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주인 없는 기업은 언제나 부패와 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했다. 대우조선이 다시 수술대에 올라가지 않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힘 있는 주인을 하루빨리 찾는 것이다.
김우일 대우M&A 대표 wikimokg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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