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80

 
이순신 함대가 밤을 타서 움직이는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적이 이순신의 그림자만 봐도 달아나는 통에 적을 섬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당항포를 습격하는 줄을 모르게 하여 안심을 주는 방략이기도 했다. 실제로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31척의 적군들은 이순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 모두 도망쳐 버렸다.

이순신 장군이 가는 길이 안전지대라는 소문을 들은 삼남 유민은 난을 피하여 순신의 행영 뒤로 들어온다. 막으려야 막을 수 없다. 부득이 군량을 헐어 구제하였다. 태산이라도 부족할 것 같았다. 굶어 죽는 형상은 목불인견이었다. 순신은 하는 수 없어 조趙나라 이목(중국 춘추전국시대 조나라의 무신)과 한漢나라 조충국(중국 전한의 무제~선제 때의 장군)의 둔전(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이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병사가 경작하던 토지)하던 예를 따라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한산도 부근 해평농장, 순천 돌산도 흥양의 도양장(전남 고흥군 도양면 도덕리), 해남의 황원곶(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강진의 화이도(전남 완도군 고금면) 등에서 둔전을 시작하였다.

돌산도는 군관 송성宋晟을, 도양장은 이기남을, 화이도와 황원곶은 종사관 전 부사 정경달丁景達 등을 감독으로 보냈다. 개간을 시작하기 전엔 바다 요처에 어로를 짐작하여 어업을 하게 했다. 항만 내 평탄한 간석지에는 염전을 경영케 하며 도기도 굽게 했다. 해운업의 길도 열어줘 피난민 중 상업가를 지휘하여 무역을 행하는 이가 생겼다. 이렇게 군민이 단결하여 나중에는 양곡, 어염, 포목 할 것 없이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돼 저장된 곡식이 수만석에 달했다. 아울러 새로 만든 병기는 산과 같이 쌓였으며 병선이 삼도를 합하여 대소 1000척에 달하였다.

순신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과 전쟁이 시작된 이래 종묘사직의 도우심과 제장의 충용에 힘입어 백전연승하였으나 올해엔 적군이 경남일대로 모여들어 험고한 곳에 성채를 쌓고 곳곳마다 소굴을 지어 지키고만 있어 우리 수군이 공격하질 못하고 있다. 우리 군사가 해가 다 가도록 이들을 물리치지 못한 점이 분개할 만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병기와 군량이 풍족하고 새로 만든 병선이 배倍가 되었다는 점이다. 시기를 보아 한번에 부산의 적의 근거를 토멸하여 적으로 하여금 돛 조각이나 노 하나라도 일본으로 가지고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자.”

적을 향해 위세 과시하는 조선군

1594년 2월 12일 서울에서 선전관 송경령宋慶苓이 한산도 행영에 내려와 선조의 밀지를 전하였다. 순신은 숙배한 뒤에 받들어 읽었다. “경이 바다 위에서 해를 넘기며 나라 위해 수고함을 내 항상 잊지 않노라. 공을 세운 장병 중 아직 상을 받지 못한 자를 알리도록 하라.” 그 와중에 이순신은 적선 8척이 춘원포春院浦 선암仙巖에 정박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균이 적선이 8척뿐이라는 데 용기를 얻어 출전을 부탁했다. “선암에 들어온 적선은 소인이 치러 가겠소.” 순신은 불가하다며 이렇게 답했다. “소리를 탐하면 대리를 잃는 것이니 소탐대실이란 말이 있지 아니하오? 아직 기다리시오.”

▲ 이순신은 이억기와 더불어 바깥 바다에서 진을 벌이고 외선을 방어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번엔 군관 제재호諸在浩 등이 보고를 했다. 적선 30여척이 고성, 진해, 양현 일대에 침입하여 분탕질을 하고 백성을 마구 죽이고 있으며, 기왓장과 왕대를 배에 가득 담고 있다는 거였다.  다른 보고도 속속 들어왔다. 적의 대선 10척, 중선 14척, 소선 7척 합 31척이 당항포와 오리량(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고리량)에 들어와 있다는 내용의 보고였다. 이순신은 삼도 주사의 정예만을 거느리고 한산도 앞바다에서 밤을 타서 잠행, 지도(경남 통영시 용남면 지도리에 해당되는 섬) 앞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밤을 지내고 4일 새벽 전선 20척을 견내량에 잠복하게 하여 웅천, 김해 등지의 적이 함부로 준동할까 방비하게 했다. 또한 좌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일령장 노천기盧天紀, 이령장 조장우曹長宇, 좌별도장 전 첨사 배경남裵慶男, 판관 이설, 좌위장 녹도만호 송여종 등 31명의 장수를 선발해 조방장 어영담을 주장으로 삼아 당항포를 몰래 습격하게 했다. 동시에 이순신은 이억기를 데리고 대군을 통솔, 적의 구원의 길을 가로막기 위하여 학익진을 벌이고 거제 장문포(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웅천 등지의 적을 향해 위세를 과시했다.

이렇게 밤을 타서 행군한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적이 이순신의 그림자만 봐도 달아나는 통에 적을 섬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당항포를 습격하는 줄을 모르게 하여서 안심을 주는 방략이기도 했다. 이때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31척의 적군들은 이순신이 또 온다고 하여 낙담한 채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진을 쳤다.

소굴로 숨은 소서행장의 무리

어영담은 제장을 지휘하여 바로 들어가 때려 부수려 했지만 날이 저물기 시작해 포구에서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 이순신은 이억기와 더불어 바깥 바다에서 그대로 진을 벌여 외선을 방어하고 어영담은 제장을 거느리고 당항포를 공격하였다. 기왓장과 대나무를 가득 싣고 선창에 열박하여 있던 31척의 대소 적선에는 적군이 없었다. 이순신의 위세를 무서워하여 밤사이에 배를 두고 도망친 거였다. 그래서 이순신의 제장들은 이 배들을 모두 분멸하여 버렸다. 원균도 적의 빈 배들을 보고는 탐공지심에 미칠 듯이 좋아하면서 때려 부수는 데 한몫을 거들었다.

진해만 바다를 덮고 있던 순신의 함대는 동서로 진을 변화시켜 기정변화奇正變化로 엄습할 형세를 보이며 공격을 감행하니, 포성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영등·장문·제포·웅천·안골·가덕 등지에 자리잡은 소서행장 등 적군들은 공격이 올까 무서워하며 임시막사를 자신들의 손으로 불사르고 소굴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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