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멸시’ 일본군의 ‘무시’
명나라의 ‘멸시’ 일본군의 ‘무시’
  •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 호수 159
  • 승인 2015.10.02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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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82

1594년 9월 27일. 첨지 곽재우, 좌랑 김덕령 등이 각기 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들어오고 그날밤 전라병사 선거이가 들어왔다. 선거이는 순신과 동석하고 곽재우와 김덕령은 각기 친한 장수에게 명하여 대접하게 하였다. 한산도 대첩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 의승장 사명당은 가등청정을 만나기 위해 울산 서생포를 세차례나 찾아갔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곤양군수 이광악은 진주성에서 목사 김시민과 함께 일본군을 막은 장수였다. 이광악은 술을 배에 많이 싣고 한산도로 와서 순신을 보고 전승축하를 하였다. 이광악은 의승장 ‘사명당’ 임유정이 적장 가등청정과 왕래하면서 묻고 답한 기록을 구하여 순신에게 올렸다. 기록에는 1594년 4월께 사명당이 명나라 제독 유정과 도원수 권율의 지휘를 받아 가등청정을 만나보려고 세차례나 울산 서생포를 찾아갔다. 그런데 처음에는 거절을 당하고 그 뒤에는 부하 가등희팔加藤喜八이란 장수만 만나고, 세번째가 돼서야 가등청정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문답을 일본은 ‘송운문답松雲問答’이라 하였다. 송운은 사명당 임유정의 호다. 사명당 일행은 통역 김언복金彦福, 장희춘蔣希春의 무리였다. 가등청정의 곁에는 일본장수들의 진중에 의례히 데리고 다니는 진승陣僧이라는 중이 있었다. 가등청정의 진승은 일진日眞과 천우天祐였다. 문답내용을 보면, 가등청정은 조선의 내정을 자꾸 물었다. 사명당은 “장군의 당당한 자격으로 풍신수길의 부하 노릇을 하지 말고 풍신수길을 어떻게든지 조처한 뒤 관백이 되시오”라고 동문서답하였다.

가등청정은 사명당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채 “귀국(조선)의 보물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사명당은 이렇게 답했다. “장군의 머리로 보물을 삼소. 장군의 머리를 바치는 자 있으면 천금의 상, 만호의 봉이 있으니 어찌 보물이 아니겠소.” 가등청정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명의 장수 유정이 어찌하여 전라도로 진을 옮긴 것이오”라 물었다. 사명당은 권율이 성주로 오니까 유정은 호남으로 이진하였다고 군사상 정세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서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 서로 싸우도록 이간질을 하는 데 힘을 썼다.

어영담 병사로 애통에 빠진 순신

이런 문답은 사실 이례적인 게 아니었다. 소서행장과 김응서 간에도 왕래문답이 있었다. 권율이 사명당을 시켜 가등청정과 교섭하는 동안 김응서와 소서행장도 왕래하였다. 이런 와중에 조선편이 일본의 반간에 넘어가 이순신이 감옥으로 잡혀가고 용렬한 원균이 수군을 통솔하다가 칠천도 싸움에서 전멸을 당해 원균의 수급이 풍신수길의 행영에 높이 달렸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일본군과의 문답을 보고 “통분함을 참을 수 없다”며 난중일기에 기록했다.

▲ 도제찰사에 오른 좌의정 윤두수는 도원수 권율, 통제사 이순신, 전라병사 선거이 등 여러 장수에게 거제도에 있는 적을 치라고 하였다.[사진=더스쿠프 포토]
1594년 4월 9일 조방장 어영담이 한산도 진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이때 한산도 진중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순신까지도 병으로 신음하고 난 뒤였다. 아, 슬프다. 전년에 정운이 전사하고 금년에 또 어영담을 병으로 상실하게 되니 순신의 애통함은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난리 초에 적극적으로 출전하기를 주장하던 장수는 정운, 어영담, 송희립, 이운룡, 이영남 등 몇몇 사람뿐이었다. 이러기에 순신은 어영담이 광양현감에서 파직됐을 때 그를 그대로 두어 달라고 장계를 올렸던 거다. 장수로서의 지략과 기량을 사랑하여 국사國事에 힘을 함께하자는 것이었다.

이 무렵, 명나라 경략사 송응창, 제독 이여송의 대군은 벽제관 패전 이후 일본군의 전투력을 두려워하여 싸우기를 꺼렸다. 또한 심유경 일파의 화의에 혹해 우물쭈물 하다가 중국으로 철수해 버렸다. 오직 유정과 왕필적의 군사만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정도 일본군이 무섭다는 생각에 진주성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좌의정 윤두수가 도체찰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 통제사 이순신, 전라병사 선거이, 조방장 곽재우, 형조좌랑 김덕령 등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거제도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치라고 하였다.

1594년 9월 27일에 첨지 곽재우, 좌랑 김덕령 등이 각기 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들어오고 그날밤 전라병사 선거이가 들어왔다. 선거이는 순신과 동석하고 곽재우와 김덕령은 각기 친한 장수에게 명하여 대접하게 하였다. 다음날에 병선 50척이 곽재우와 김덕령의 군사를 실고 장문포를 향하고 순신은 대군을 통솔하면서 수륙병진하였다. 곽재우와 김덕령은 배에서 내려 산으로 오르고 순신은 포구 안으로 들어가 대번에 적선 2척을 깨뜨려 불살랐다. 적군은 순신의 병선을 무서워하여 창황망조하여 두 갈래로 나뉘어 깊은 소굴 속으로 달아났다.

한산도에 모여든 제장들

곽재우와 김덕령은 기세를 얻어 말을 타고 창을 들고 병사들을 끌고 사납게 돌진하였다. 적병은 견고한 성채에 의지하여 몸을 숨기고 조총만 비 오듯 쏘아대면서 패목牌木을 내세운다. 그 패목에는 “日本與大明方講和不可相戰(일본과 명나라가 강화하니 서로 싸움이 불가하다)”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조총의 탄환이 퍼붓는 바람에 김덕령 같은 용장도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지를 못하고 곽재우와 함께 뒤로 물러나 회군을 했다. 선거이, 곽재우, 김덕령 등 육로 제장들은 순신의 진중에서 10일간 머물면서 병법과 무예를 논하고, 옛이야기를 나누다 10월 7일 출행했다. 순신은 제장들에게 시를 지어 석별의 정을 표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논공행상이 있었다. 대신들은 좌의정 윤두수가 탐욕스럽기 그지없고, 우의정 유홍은 큰소리치다가 나라를 다치게 한다며 대론(지금의 탄핵)을 일으켰다. 영의정 유성룡만 무사했다. 결국 좌ㆍ우의정은 다 교체돼 좌의정에는 김응남이, 우의정에는 정탁이 앉게 됐다. 한편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은 군사 8000명을 모집했다는 이유로 정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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