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찬의 프리즘 | 청년희망펀드의 정치사회학

▲ 청년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꺼내든 청년희망펀드가 가입 초기부처 강제성·실효성 논란에 휩싸였다.[사진=뉴시스]
성금과 기부가 아름다운 것은 정성이 깃들어서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가슴에서 우러나 내놓는 자발성이 의미를 더한다. 한 푼 두 푼 모인 돈이 꼭 필요한 곳에 쓰이는 투명성은 도움을 주고받는 이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이런 특성을 거스르는 성금과 기부가 적지 않다. 모금 과정부터 정성보다는 무성의가, 자발성보다는 강제성이 작용한다. 모금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뒤따를 불이익을 염려하거나 남보다 앞서 거액을 내놓고선 대가를 기대하기도 한다. 모금액의 쓰임새에서도 투명성보다 자의성이 개입하거나 깔끔하지 않은 뒤처리로 잡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부터 걸핏하면 관官 주도로 이런저런 명분의 성금을 모금하고, 기업들과 국민이 이를 반강제성 준조세로 받아들인 탓이다. 공적 차원의 문제 해결 노력이 우선돼야 할 사안까지 사적 해결 방식인 성금 모금이 동원됐다. 정부 여당이 제안하면 방송사들이 생방송으로 분위기를 잡기도 했다.

공식 국방예산과 별개로 1973~1983년에 480억원이 방위성금 명분으로 조달됐다. 기업인과 일반 국민은 물론 초ㆍ중ㆍ고교생과 해외교포들도 기탁했다. 1981 ~1987년 5공화국 시절에 금융기관에서 접수한 새마을성금 총액이 455억원이다. 그 타성인가?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인 2008년 1월 화재로 불탄 숭례문 복원을 위해 국민성금을 모금하자고 제안했다. 2011년 1월 공영방송 KBS는 “국군장병에게 발열조끼를 보내자”며 특별모금 생방송을 했다.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피격 사건과 관련해서도 국민성금이 모금됐다. 태풍과 집중호우로 수해가 발생하면 어김없이 성금모금 방송이 편성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월 15일 ‘청년희망펀드’ 모금을 제안했다. 21일 대통령이 1호로 기부했고, 총리를 비롯한 장관들과 여당 지도부가 뒤따랐다. 26일 홈페이지가 만들어졌고, 30일 청와대 경제수석이 경제정책 브리핑에서 각계각층의 ‘자발적 참여’가 지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곧 재단도 만들어진다. 일사천리다.

그런데 벌써 ‘강제 가입’ 논란 등 잡음이 들린다. 펀드를 취급하는 KEB하나은행은 전 직원이 1인 1계좌를 개설하도록 요청하는 공문을 영업점에 보냈다. 영업점장들은 이를 직원들에게 전달했고, 청원경찰과 파트타이머 등 비정규직들까지 가입했다. 은행측은 자발적으로 참여토록 안내했다지만 직원들로선 ‘점장 말씀’을 흘려들을 수 없었으리라.

다른 은행과 직원들도 압박을 받는 모습이다. 국무조정실이 펀드를 취급하는 KEB하나ㆍ신한ㆍ국민ㆍ우리ㆍ농협 등 5개 은행들로부터 매일 누적 가입 건수와 금액 통계를 보고받는다니. 수협과 기업은행, 지방 은행들도 펀드 취급 은행으로 인가받아 잇따라 영업에 나서고 있으니 ‘은행열전熱戰’은 가열될 것이다. 이쯤 되면 공기업과 정부 산하기관은 물론 기업들도 눈치를 보기 마련이다. 총리가 기업(법인) 돈은 받지 않겠다고 했으니 기업인들로선 사재를 부담해야 할 텐데 얼마를 내놔야 할지 신경이 쓰이리라. 눈치 빠른 어느 방송사가 청년희망펀드 모금 생방송으로 분위기를 띄울 수도 있다.

대통령이 펀드를 제안한 뜻은 이해한다. 청년실업 100만명 시대의 고용절벽 상황에서 ‘헬조선(지옥 대한민국)’이란 말까지 나돌 정도다. 그렇다고 기부금을 모은 펀드로 청년실업을 얼마나 풀 수 있을까. 이런 식이라면 ‘어린이(보육)희망펀드’ ‘노인(부양)희망펀드’도 만들어야 하나. 청년희망펀드로 얼마를 모아 어디에 쓸 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런 판에 과거 성금과 기부 과정의 잘못이 나타나고 있으니 펀드의 앞날이 걱정스럽다. 청년실업 문제는 정부 정책과 예산으로 해결해야지 성금이나 기부에 기댈 일이 아니다. 다른 부문의 재정을 아껴서 재원을 확보하든지 세금을 공정하게 더 거둬 펀드에 투입하는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
양재찬 더스쿠프 대기자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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