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50년 맞은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이 백두산 백산수를 신라면·새우깡처럼 농심의 차세대 먹을거리로 키워 낼지 관심이 쏠린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신춘호(83) 농심그룹 회장의 라면·스낵사업이 어언 반세기를 맞았다. 9월 17일 열린 농심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솟구치는 감정을 억제하며 식품보국食品報國의 의지를 재삼 다짐했다. 맏형 신격호(93) 롯데 회장의 라면사업 반대에 오기 하나로 농심을 일궈 온 그의 사업 역정歷程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도전과 혁신의 역사였다. 이제 백두산 백산수를 신라면·새우깡처럼 농심의 차세대 먹을거리로 키워 낼지가 관심거리다.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과 신춘호 농심 회장. 범 롯데가家 형제 사이인 이들 두 사람에겐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두 사람 다 한국 재계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창업 1세대 기업인이란 점이다. 불굴의 사업 의지를 가진 점과 언론 등 외부에 좀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보수적 기질도 닮았다.

차이점은 기업 창립 과정이나 규모, 2세 승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남매(6남4녀) 중 맏이인 신격호 회장은 한·일 양국에서 70년 가깝도록 거대 기업 롯데를 축성했다. 한국 롯데만 해도 재계 5위에 연매출 80조원 규모다. 최근 왕자의 난으로 스타일을 확 구기기는 했지만 농심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큰 기업군을 일궈 낸 건 사실이다.

이에 비해 신격호 회장의 넷째 동생인 신춘호 회장(3남)은 처음엔 맏형 밑에서 사업을 하다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독립한 케이스다. 그는 50년에 걸쳐 농심을 한국 굴지의 식품 전문 기업으로 키워 냈다. 농심은 지난해 매출 2조417억원(금감원 연결기준)을 기록했고, 라면과 스낵에 관한 한 국내 1등 기업이다(그래픽 참조). 규모는 롯데에 비할 수 없지만 사업 전문성이란 면에서는 롯데에 뒤질 바가 없다.

차이점은 또 있다. 신격호 롯데 회장은 93세가 되도록 두 아들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제대로 못해 올 여름 톡톡히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신춘호 농심 회장은 일찌감치 장남(신동원 농심 대표 부회장·57) 중심의 승계 구도를 진척시켜서 별 잡음이 없었다. 재계엔 두 회장이 서로 왕래도 잘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업적으로 틀어진 나머지 가족 관계까지 상처를 입었다는 얘기다. 협력은 고사하고 라면이나 생수사업에선 경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롯데 왕자의 난 때도 농심 오너들은 남의 일 보듯 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는 뿌리가 있다. 형 밑에서 롯데 키우는 일을 돕던 신춘호 회장은 1965년 라면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당시 신격호 회장은 한국에서 밥 대신 라면을 먹을 사람이 있겠느냐며 반대했다고 한다. 그때 34세이던 신춘호 회장은 결국 독자 사업의 길을 택한다. 그는 자본금 500만원으로 지금의 농심 사옥인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기계를 들여놓고 라면 제조에 들어갔다.

하늘 같던 형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양라면 등이 잡고 있던 라면시장에 후발주자로 참여한 것. 1999년에 내놓은 자서전 「철학을 가진 장이는 행복하다」에서 그는 당시 심경을 이렇게 털어 놨다. “신적인 존재나 마찬가지인 큰형이 반대하자 일종의 오기가 생겼다.” 이처럼 그의 사업 역정은 처음부터 도전과 혁신의 길이었다.

지난 9월 17일 서울 신대방동 농심 본사에서 열린 창립 50주년 기념식에는 창업자 신춘호 회장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생각보다 조촐했지만 농심의 사업 역정과 미래 청사진이 압축적으로 소개된 뜻 깊은 자리였다. “1970년대 초 회사 사활의 기로에서 회생의 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짜장면(1970년)’, ‘소고기라면(1970년)’, ‘새우깡(1971년)’ 등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신제품이었다. 지난 50년 속에 녹아든 부단한 자기혁신 본능을 새롭게 해 백두산 백산수를 중심으로 글로벌 농심, 100년 농심을 이룩해 나가자.”

큰형 반대 무릅쓰고 라면사업 시작

신 회장이 주도한 농심 히트상품 계보는 자못 화려하다. 짜장면(국내 최초 인스턴트 짜장면)→소고기라면→새우깡(국내 스낵 효시)→농심라면(1975년)→포테토칩(1980년·국내 최초 감자칩)→너구리·육개장사발면(1982년)→안성탕면(1983년)→짜파게티(1984년)→신라면(1986년)→짜왕(2015년·3㎜ 굵은 면발). 1975년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 카피로 화제가 된 농심라면이 크게 히트하자 3년 후인 1978년엔 회사 이름까지 아예 농심으로 바꿔 버린다. 지금 생각하면 제품 작명의 귀재 신 회장이 광고 카피에 형님과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심정을 담은 것 같아 짠한 느낌마저 든다.

이 중에서 단연 농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최대 히트상품을 들라면 신라면과 새우깡을 꼽을 것 같다. 새우깡 개발 당시 신 회장이 연구원들과 함께 1년 가까이 공장에서 가마니를 깔고 자며 4.5t 트럭 80대 분의 밀가루를 사용해 성공한 일화는 유명하다. 연매출 7000억원 상당으로 라면시장 부동의 1위를 지켜 온 ‘신라면’ 역시 그의 뚝심이 작용해 탄생했다. 1986년 출시를 앞두고 “매운맛이 강해 상품화가 힘들 것 같다”는 직원들의 우려에 그는 “독특한 이 매운맛이야말로 차별화의 포인트”라며 밀어붙였다고 한다. 올해 초 라면 시장에 프리미엄 짜장면 열풍을 불러온 ‘짜왕’도 신 회장의 독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장에서는 농심이 차세대 먹을거리로 ‘백산수’를 들고 나온 것에 대해 ‘다소 이외’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농심은 생수사업이 초기 대규모 투자만 하고 나면 미래 수익성이 비교적 보장되는 유망 글로벌 사업이란 점에 착안한 것 같다. 국내는 물론 연 20조원 규모로 추정되는 중국 시장을 보고 생수사업에 나섰다는 얘기다.

지난해부터 백두산 이도백하 지역에 2000억원을 들여 건설한 백산수 제2공장이 10월 중 가동을 앞두고 있다. 이 공장 제품의 약 70%를 중국에 공급하고 나머지는 국내로 들여온다는 것. 재미있는 점은 생수시장에서 롯데와 치열한 2위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올해 7000억~80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국내 생수시장 1위 업체는 광동제약(제주 삼다수)으로, 점유율은 약 45%다. 형님 롯데家와 달리 아우 농심家는 2세 승계 작업이 서둘러 진행됐고, 잡음도 별로 들리지 않아 비교가 된다.

 
이런 점은 아우 신 회장의 판단력이 앞선 것 같다. 그는 3남2녀를 두고 있다(그래픽 참조). 이들 중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부인인 막내딸 신윤경(47)씨를 제외한 3남1녀가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장남(신동원 농심 대표이사 부회장)과 차남(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은 같은 57세로 쌍둥이다. 신 회장은 2세 중 누구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겠다고 드러내 말한 적은 없다고 한다.

농심家, 장남 중심 승계 사실상 마무리

하지만 지난 10~20년에 걸쳐 장남 중심으로 역할을 차별화하거나 2003년 출범시킨 지주사 농심홀딩스 지분 차등 배분 등을 통해 후계 문제를 정리해 왔다는 게 재계 분석이다. 농심홀딩스 지분율은 장남 신 부회장이 36.88%로 최대주주이며, 차남 신 부회장은 19.69%로 그 절반 수준으로 알려졌다. 3남 신 부회장은 농심홀딩스 주식은 없고 메가마트(부산지역 유통사) 주식 57.94%를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신 회장은 고령에도 서울 신대방동 사옥으로 출근해 그룹의 큰 방향이나 핵심 전략을 챙기고 있다. 통상적인 경영은 4자녀와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 큰형 밑을 떠나 50년 동안 도전과 혁신으로 농심을 보란 듯이 키워 낸 그의 기업가 정신이 왠지 돋보인다. 이제 농심도 2세 회장이 탄생할 시기에 다가선 것 같아 귀추가 주목된다.   
성태원 더스쿠프 대기자 iexlov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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