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멘토링 ⑫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 교수

참여연대에 경제민주화위원회를 만들어 국내 최초로 경제민주화 시민운동을 벌인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청춘들에게 “불평등한 현실에 분노하고 신념대로 행동하라”고 권했다. “자신을 힐링할 생각 말고 세상을 힐링해 보라”고 부추겼다.

 
Q 멘티가 멘토에게
양심을 지키고 어떤 상황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느니 한때의 치기라느니 합니다. 제가 꿈꾸는 이런 인생은 정말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 같은 걸까요?

A 멘토가 멘티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가는 자칫하면 죽습니다. 때로는 신념을 굽힐 필요도 있어요. 인생이란 올 오어 낫씽(all-or-nothing), 모 아니면 도가 아닙니다. 이루고 싶은 것이 모두 100가지인데 오늘 10가지를 이뤘다면 남은 과제는 90개가 되는 거죠. 그 10가지조차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단 한 가지도 이루지 못하는 겁니다. 봉사활동 경력조차 하나의 스펙이 돼 버린 시대지만 봉사를 하는 건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통해 깨닫는 것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죠. 물론 교육 문제는 심각합니다. 우리나라 대학 캠퍼스의 학구열은 취업의 열기일 뿐입니다.

100% 자기 신념에 기초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정한 경험을 쌓으면 신념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기존의 신념이 강화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념의 90%가 꺾이더라도 자신의 기본적 가치관을 지키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단 10%를 이행하는 것도 엄연한 실천이에요. 근본적으로 신념이란 게 과연 필요한가? 필요합니다. 신념이란 삶의 좌표입니다. 좌표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산다면 여름날 하루살이와 다를 게 없어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죠. 신념 없이 사는 건 등대 없이 칠흑 같은 밤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비유의 한계는 우리가 인생이란 고해를 항해할 땐 등대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도 한다는 겁니다. 불변의 절대가치에 해당하는 신념도 있지만 경험이 쌓이고 환경이 바뀌다 보면 변하는 신념도 있습니다. 특히 신념을 현실로 옮기는 방법론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떤 한 방법만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젊은 날에 무엇인가 믿고, 추구하고, 무엇이 옳은지 따지는 건 필요한 일입니다. 인생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또 절대적 신념을 꺾는 게 아니라면 사회 변화를 수용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게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 세상과 조화롭게 사는 방법입니다.

절대가치에 해당하는 신념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남들이 재단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양보해서는 안 될 가치죠. 그런 절대적 신념이 아니라면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지키면 됩니다. 단 절대적 신념을 실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단히 고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어쩔 수 없이 실천하지 못했을 때도 스스로 합리화ㆍ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자신을 지키는 길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갈등을 해소하려고 자신을 합리화정당화하는 건 자기 신념을 두 번 죽이는 겁니다. 거듭 말하지만 자기 정당화를 위해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강변해선 안 됩니다. 그건 가짜 신념입니다.

알바노조는 사회 변혁의 좋은 시그널

양심을 지킨다는 건 옳고 그름의 문제입니다. 자기 자식에게 옳은 건 자기가 속한 조직의 아랫사람에게도 옳은 것이죠. 그런데 사실 일관성 있게 양심적으로 살기란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이 문제로 갈등하게 만들죠. 특히 이해관계가 얽히면 보통 사람이 양심을 지키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이해관계가 없을 때 옳은 일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양심을 지키는 것은 한 개인의 삶에도 역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기본 가치에 충실하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 나아가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삶을 사는 건 누구에게나 중요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큰 권력을 쥐었어도 옳지 않은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불의한 역사를 필설로 왜곡할 수 없는 것과 같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닌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상적 삶을 영위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자체를 기피하고 가치판단을 배제하려 드는 것, 이런 태도를 당연시하는 건 위험합니다. 기득권 세력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중의 이런 심리를 이용합니다. 나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보다 젊은 세대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들지 않는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해관계가 없고 행동할 수 있을 땐 행동하세요. 손해를 감수하고 행동하라는 건 무리한 요구지만 그렇지 않을 땐 양심대로 행동해야죠.

이 일그러진 세상, 기울어진 운동장에 분노해야 합니다. 왜곡된 한국 사회에 순응할 게 아니라 여러분은 분개해야 돼요. 노력한 만큼 보상해 주지 않는 이 잘못된 구조에 마땅히 의분을 느껴야 합니다. 이 분노가 바로 자기 발전의 출발점입니다. 분노한다면 그다음엔 행동해야죠. 이렇게 볼 때 알바노조의 출현은 좋은 시그널입니다. 그들이 맥도널드를 찾아가 임금을 올려달라고 시위하는 거 보고 바로 이거다 싶더군요.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이렇게 갔어야 합니다.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라는 이념, 노동 가치라는 이론이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서 시작된 이런 움직임을 바로 젊은 세대가 주도했습니다.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이런 젊은이들을 1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거 같습니다. 이참에 나는 이들이 정치세력화했으면 합니다. 이들 중 소수라도 그러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내가 참여연대를 할 때도 그렇게 소수가 시작했습니다. 열댓 명이 서울 용산역 앞 집창촌에서 시작했는데 적은 인원이었지만 가치관이 뚜렷했고, 행동에 옮기겠다는 의지가 굳었습니다. 특히 가치관의 정립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더라도 자기 삶의 테두리를 스스로 결정해야죠.

맛집 찾아다니며 힐링하는 거 이제 그만하세요. 책 장수들이 꼬드기는 ‘긍정의 힘’에 넘어가지 마세요. 다 말장난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 절대 안 됩니다. 산은 구조의 변혁으로 생기는 거지 퇴적의 산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힐링할 생각 말고 세상을 힐링해 보세요. 개인이 바뀌어도 이 사회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대, 20대가 집단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고희를 맞은 가수 서유석이 부른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청춘만 아픈 게 아닙니다. 노인도 아파요. 이 노래 가사에 “인생이 끝나는 것은 포기할 때 끝장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젊은 세대를 가리켜 3포 세대, 심지어 7포 세대라고 하는데 포기해서 이르는 행복의 길이란 없습니다. 즐거움과 행복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얼핏 행복해 보여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에 맞지 않는 행복이에요. 우리 세대는 다르다는 강변은 자기 변명이거나 자기 기만일 뿐입니다. 위로니 힐링이니 하는 사회 풍조도 기득권 구조를 강화할 뿐입니다.

8년 전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나왔을 때 지금은 30대인 이 세대가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순응한 결과 오늘날 20대가 3포 세대가 된 겁니다. 심지어 잉여세대로 불리게 된 거예요. 그 책에서 저자들이 “지금 10대의 미래는 더 어둡다”고 예언했는데 그대로 된 셈이죠. 자신이 속한 계층에 대한 환상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부모의 계층을 자신의 계층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다섯명 중 한 명이 실업자이고 3분의 1 이상이 빈곤층에 해당하는 세대입니다. 100명 중 15명만 삼성, 현대차 포함해 구성원이 300명 이상인 대기업에 들어가고 나머지 85명은 중소기업행이 예고된 군상들입니다. 거기서 10여 년 근무하면 연봉이 3000만원 조금 넘겠죠. 이 엄청난 불평등 구조가 스펙 더 쌓고 힐링 한다고 바뀝니까?

무엇을 할 것인가? 최소한 선거 때 투표라도 하세요. 투표할 때 자신의 계층에 충실하게 하는 겁니다. 자기 삶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되잖아요. 이런 작은 행동들이 결국 세상을 바꿉니다. 거대 담론에 치우치지 말고, ‘이런 거대한 구조가 내가 이렇게 행동한다고 바뀌겠나’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나비 혁명이죠. 선거 때 선택할 사람이 없으면 여러분을 선택하게 만드세요. 여러분이 어젠다를 내놓지 않으니까 정치권이 기성세대와 똑같이 취급하는 겁니다. 등록금을 절반으로 내리라고 하니까 여러분의 표를 얻으려고 반값 등록금을 공약하잖아요.

나이 들면 오히려 진보가 돼야

당장 비정규직은 부당하다고 여러분이 한목소리를 내면 정치꾼들이 젊은 표가 무서워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 겁니다. 여러분 세대를 억누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세요. 그러면 세상이 바뀝니다. 그럴 때만 세상이 변합니다. 여러 가지로 변주가 되지만 “젊어서 진보가 돼 보지 않은 사람은 바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진보라면 더 바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풍조가 있는데 나는 오히려 나이가 들면 진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처럼 젊을 때는 기성의 구조체제에 적응하고 세상에 자신을 어느 정도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어요. 젊은 세대가 머릿속은 진보일지 몰라도 행태는 보수적인 것, 스스로 원하는 자신의 모습보다 조직이 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나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보수란 기성의 구조체제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 그 틀에서 벗어날 자유가 생기고 세상사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됩니다. 세상은 스스로 진화하는 게 아니라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유토피아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아요.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려면 지금의 이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죠. 그러니 나이가 들면 진보가 되는 게 맞습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창조적이 되고 싶으면 비판적 사고를 하세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절대 창조적이 될 수 없습니다. 창조적이라고 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 존재하게 만드는 게 아니에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뒤집어 볼 때 창조적 사고가 시작됩니다.
이필재 더스쿠프 대기자 stolee@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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