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 국세가 위태로웠지만 조선 조정은 당파싸움에만 열을 올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명나라와 일본은 화의를 꾀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대신은 주전론과 주화론으로 나뉘어 갑론을박을 거듭하고 있었다. 선조는 주화론을 배척했다. “일본은 원수인데 어찌 원수와 화친을 말하리오”라는 게 이유였다. 이 때문에 유성룡 등 충신이 또다시 조정에서 물러났다.

명나라는 일본의 풍신수길을 봉왕封王하기 위해 책봉정사 후작 이종성, 책봉부사 양방형과 함께 심유경을 조선에 보냈다. 조선은 책봉정사의 접반사로 이항복, 책봉부사의 접반사로 김수를 각각 내세웠다. 심유경은 설유說諭 황신黃愼에게 맞이하도록 했다.  하지만 김수는 부산에 있던 일본군을 수륙 협공을 하자고 이순신과 약속해 놓고 무서워서 도망친 신의가 없는 사람이었다. 황신은 미관말직이었지만 쓸 만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영상 유성룡이 천거한 이였다.

접반사 이항복은 책봉정사 이종성에게 빨닥젓(개구리젓)을 선물로 보내 큰 칭찬을 받았다. 참 재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하여 이종성은 ‘식와사신食蛙使臣’이란 패호를 찼다. 심유경을 맞은 황신은 웅천에 있는 소서행장의 진으로 들어갔다. 소서행장은 심유경을 윗자리에 앉히고 황신에게는 좌석을 주지 아니하였다. 황신이 노하여 소서행장의 무례함을 책하였다. 소서행장은 “천조의 관리와 동석함이 어떨지 몰라 그랬다”고 변명하면서 사과했다.

명나라와 일본은 이렇게 외교를 통해 절충을 꾀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주전主戰, 주화主和 양파로 나뉘어 다툼을 벌일 뿐이었다. 주화론자로는 전라감사 이정암이 있었다. 연안부 싸움에서 흑전장정의 침략을 물리친 공신이었다. 그의 논리는 이랬다. “지금 국세國勢가 피폐하고 인민이 이산하였으니 일본 측의 화의를 잠시라도 들어줘서 월왕 구천이 와신상담하던 것을 본받아 실력을 양성한 뒤 다시 싸우자.” 하지만 조정 일부 대신은 벌떼같이 일어나 대간 이정암을 베어 죽이더라도 죄가 남을 것이라고 극언하였다. 1594년 5월의 일이었다.

▲ 소서행장은 명나라 요구인‘일본군 철수’를 관철시키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그해 5월 26일, 영의정 유성룡이 선조의 부름을 받아 입궐할 때 좌찬성 성혼이 대동하였다. 주전론자이던 유성룡은 이런 이유로 뜻을 바꾼 상태였다. “명나라 장수는 믿을 수 없다. 인민은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운 지경이어서 하루를 지탱하기 어렵다. 그러니 명나라로 하여금 외교정책으로 일본군의 형세를 늦추고 안으로는 국방에 힘써 살길을 도모해야 한다.”

선조는 성혼에게 주전과 주화의 이해득실을 물었다. 성혼은 “지금 국세가 심히 위태하오니 잠시 싸움을 쉬고 자강지책 강구를 도모함이 옳은 듯합니다”면서 “능히 싸우지 못하는 우리가 명나라의 강화책을 반대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고 답했다.  선조는 성혼의 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때마침 이정암의 주화 장계가 올라왔다. 성혼의 말에는 입도 벌리지 못하던 대신들은 이정암의 장계에 대해선 대공격을 했다.

이 모습을 본 성혼이 “이정암은 충의대절이 있는 사람이니 이 사람을 깊이 나무랄 바는 아닌가 합니다”하면서 “죽을 마음이 없고는 이런 말을 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변호했다. 하지만 선조의 생각은 달랐다. “일본은 원수인데 어찌 원수와 화친을 말하리오! 이제 화친을 말하는 자는 죽임이 마땅하다!” 유성룡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물러나왔다. 이후 3사의 제신이 주화론을 배척하였다. 그 우두머리는 유영경이었다. 선조는 오언시를 지어 조정에 방을 붙이게 하였는데 내용은 이랬다.

선조는 전교傳敎도 내렸다. “간세배(간사한 짓을 하는 나쁜 무리)의 사특邪慝(요사스럽고 간특)한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무릇 조정의 일 처리와 전선戰線에 있는 장병의 일이 성혼의 사설邪說(그릇되고 간사한 말)에 잘못되겠구나.” 유성룡과 성혼은 곧 사직하고 궐하에 대죄하였으나 선조는 용서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조선 조정이 주전과 주화를 놓고 싸우는 동안 명나라와 일본 간 화의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도사都司 담종인은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는 명과 일본이 휴전 중이라 심유경 등이 소서행장의 진중에서 승 현소와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명의 장수 유대무兪大武의 시는 다음과 같다. 바둑은 수담手談 또는 좌은坐隱이라 하는 한가로운 유희다. 중국의 요순시대로부터 내려왔다. 특히 요의 단주丹朱 태자가 애호하였으며, 역대로 명인국수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한반도에는 신라 효성왕孝成王 때 당나라 사신이 와서 전했다.
 
생사와 변화의 묘리가 무궁하여 족히 장수의 용병법과 흡사하다. 이순신도 시름을 잊는 하나의 도구로써 이억기 등과 함께 바둑을 뒀다.  풍신수길을 봉왕한다며 조선으로 온 명나라의 책봉정사 이종성과 책봉부사 양방형 무리는 남원에서 개구리를 잡아먹으면서 여러 달을 묵다가 1595년 10월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강화파인 소서행장을 불러 “일본군이 전부 철수하지 않으면 풍신수길을 책봉하는 사자使者가 부산에 올 수 없다”고 엄포를 놨다.

소서행장은 “풍신수길의 명령이 아니고는 전군이 철수할 수 없다”며 심유경을 진중에 머무르게 하고 일본으로 가서 풍신수길의 의견을 알아오겠다고 했다. 실제로 소서행장은 명나라에서 먼저 나온 철병사撤兵使 진운붕陳雲鵬이란 작자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풍신수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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