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권 시장 비리로 얼룩진 이유

상품권이 또 골치를 썩이고 있다. 매년 반복되는 거액의 탈세ㆍ횡령 사건에 끊임없이 등장하더니 이번엔 위조 사건에 휘말렸다. 상황이 이 지경인 데도 기업들은 상품권 시장을 규제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부는 관련 법규가 없다는 이유로 팔짱만 끼고 있다. 상품권 시장, 이대로 놔둬도 괜찮을 걸까.

▲ 신세계 위조 상품권이 시중에 유통되면서 상품권 시장이 혼란을 겪고 있다.[사진=뉴시스]

상품권 시장에 ‘폭탄’이 떨어졌다. 신세계가 지난 9월 출시한 상품권이 위조돼 시중에 유통되다가 적발됐기 때문이다. 위조 상품권은 ‘스크래치형(scratchㆍ동전 등으로 긁어 내는 방식)’이다. 온ㆍ오프라인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이 위조 상품권은 스크래치 부분이 교묘하게 덮여진 채 판매되고 있었다. 위조 여부를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서울 명동 인근의 한 상품권 거래소 직원은 “요즘은 신세계 상품권을 받지도 팔지도 않는다”면서 “일일이 위조품인지 확인해야 하는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전했다.

상품권을 발행하는 유통업체들은 문제의 원인을 ‘스크래치형 상품권’에서 찾았다. 위ㆍ변조가 간단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따로 있다. 상품권 시장을 규제할 법률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품권 시장이 처음부터 자율로 형성된 건 아니다. 1961년에 상품권법을 제정, 상품권의 유통과 발행을 규제했다. 1971년에 상품권 발행ㆍ유통 금지 등의 부침浮沈을 겪었지만 1995년 민간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상품권법이 다시 부활됐다. 하지만 이 법은 4년 뒤인 1999년에 다시 폐지됐다. 이번엔 이유가 달랐다. 상품권 발행ㆍ유통을 규제하는 법을 없앰으로써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자는 게 폐지의 취지였다. 이때부터 상품권 시장은 말 그대로 ‘무풍지대無風地帶’가 됐다. 발행도 유통도 기업의 자유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상품권 시장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발행 규모는 2011년 4조7818억원에서 지난해 6조8888억원으로 14.4% 늘어났다. 종류도 200여종이나 된다. 최근엔 ‘모바일 상품권’까지 등장했다. 연간 발행 규모는 10조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시장이 커질수록 부작용도 심해진 것이다. 상품권을 규제하는 법을 폐지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규칙 없는 시장엔 편법과 불법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상품권 시장=무규칙 시장

무엇보다 신용카드로 상품권을 구매한 후 일정 수수료를 떼고 되팔아 현금을 확보하는 ‘상품권 깡’이 유행처럼 번졌다. 각종 뇌물 사건에 상품권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상품권을 할인해 현금화할 경우 경로를 거슬러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백화점은 상품권을 판매할 때 사 가는 사람의 신원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 거래 내역을 정부에 보고할 의무도 없다. 상품권법 폐지의 후유증이다. 지난날의 상품권법에 따르면 정부 인가를 받아야 상품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정부가 요청하면 판매 내역을 제출해야 하는 의무도 있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관련법 폐지 이후의 상품권을 ‘유령화폐’라고 불렀다. 상품권의 발행 규모를 전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입법 논의가 없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번번이 업계의 반발에 부닥쳐 자초됐다. 업계의 논리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상품권 유통 시장도 내수 시장의 일종이다. 규제하면 시장이 위축된다.” “온누리 상품권 등 전통시장 육성에 기여하는 상품권도 덩달아 규제를 받는다.” “상품권 수입보다 발행ㆍ관리 비용을 감안하면 지출이 커 실제로는 적자다.” 하지만 업계의 논리엔 어설픈 점이 많다. 무엇보다 상품권 시장이 내수 시장에 기여한다는 통계가 없다. 반면에 유통 시장을 흐리고 있다는 증거는 있다.

고액상품권 발행의 가파른 증가가 대표한다. 지난해 발행된 10만원 이상의 고액상품권은 총 3만5146장으로 전체 상품권 발행량의 17%를 기록했다. 2009년부터 10~14%를 유지하던 10만원 이상 고액 상품권 비율이 지난해 처음으로 15%를 돌파한 것이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4조1550억원, 전체 상품권 발행액의 60%에 달한다. 50만원짜리 고액 상품권은 지난해 365만장이 발행, 전년(157만장)보다 2.3배로 늘었다. 2009년(42만장)과 비교하면 9배에 이르는 수치다.

김성천 한국소비자원 법제연구팀 연구위원은 “내수경기가 부진한 가운데 백화점 고액 상품권의 규모가 늘었다는 건 지하경제가 확대되고 있다는 신호”라면서 “우리나라 서민 가운데 50만원짜리 상품권을 실제로 본 이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고액 상품권은 뇌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부피가 작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50만원짜리 상품권의 부피는 5만원권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넘치는 상품권, 연간 10조원 풀려

상품권을 규제하면 온누리 상품권 등 전통시장 육성에 기여하는 상품권도 덩달아 규제를 받는다는 논리도 허점 투성이다. 온누리 상품권의 경우 발행량이 갈수록 줄고 있어서다. 2011년 6만장에 이르던 10만원권 온누리 상품권은 2012년에 2만장으로 뚝 떨어졌다. 2013년 14만장으로 크게 회복했지만 지난해부턴 아예 발행을 하지 않고 있다. 고가 상품권의 발행 규모가 크게 늘어난 것과 대비된다.

상품권의 무분별한 발행이 오히려 중소 유통상인을 어렵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영균 대진대(법학과) 교수는 “대기업이 상품권을 계속 발행하면 소상공인들의 상권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대기업이 상품권을 발행하면서 계열사 또는 다른 기업과의 제휴를 통해 상품권 활용처를 확대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롯데그룹 상품권은 롯데 계열인 백화점ㆍ마트ㆍ슈퍼ㆍ호텔뿐만 아니라 신라면세점(호텔신라), 워커힐호텔(SK), 빕스(CJ푸드빌) 등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상품권 사업이 사실상 적자”라는 업계의 주장도 어불성설이다. 낙전洛錢 수익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참고: 낙전 수익이란 소멸시효(유효기간)가 만료돼 회수되지 않은 상품권 때문에 발생하는 기업의 수익을 말한다. 예를 들어 소비자 A씨가 B백화점의 1만원짜리 상품권을 구입해 C씨에게 선물했다고 치자. B백화점은 1만원의 현금이 생겼다. 그런데 C씨가 1년 동안 사용하지 않다가 상품권을 분실했다. B백화점으로선 물건을 팔지도 않고 1만원을 챙긴 셈이 된다.]

경실련이 지난해 한국문화진흥(문화상품권), 해피머니아이엔씨(해피머니상품권), 한국도서보급(도사문화상품권) 등 상품권 발행업체의 재무제표를 확인한 결과 3사의 2008년 발행액 대비 2013년 낙전율은 각각 1.7%, 3.6%, 2.3%로 나타났다. 평균 낙전율은 2.5%. 2008~2013년 한국조폐공사를 통해 발행된 전체 상품권 발행액에 3사의 평균 낙전율 2.5%를 적용하면 총 846억원의 낙전 수익이 발생한다.

권태환 경실련 시민권익센터 간사는 “연간 수백억원씩 발생하는 상품권의 낙전 수익은 기업이 소비자로부터 상품권 판매대금을 미리 받아 발생한 것인데도 기업에 일방으로 귀속되고 있다”면서 “사회 합의를 통해 낙전 수익이 공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튼 소리가 아니다. 소멸시효가 지난 휴면예금, 보험금, 복권당첨금은 서민금융 지원이나 복지사업 지원 등 공공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 '전통시장 살리기'를 외치며 만든 온누리 상품권의 판매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우리는 이제 상품권의 본질을 봐야 한다. 상품권은 선불지급 수단의 유가증권이다. 최근엔 가맹점의 범위와 종류까지 확대돼 상품권의 유동성이 더 풍부해졌다. 상품권이 사실상 유사통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상품권이 아무런 규율도 없이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다. 권태환 간사는 “한국은행은 시장에 풀린 화폐의 규모를 파악한 뒤 통화정책의 밑그림을 그린다”면서 “하지만 상품권 시장은 규모나 발행 기관, 발행 종류 등 모든 정보가 불확실해 정책을 수립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상품권은 한국은행이 집계하는 화폐 규모인 통화량 부문에서 제외돼 있다. 시중에 유통되는 돈의 흐름을 파악하는 통화 대표 지표로는 협의통화(M1)와 광의통화(M2)가 있다. M1은 민간보유현금과 요구불예금, M2는 M1에 저축성 예금, 투신사 머니마켓펀드(MMF) 등까지만 포함된다.

고가 상품권만 가파르게 늘어

상품권의 본질은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 무엇보다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금융회사처럼 발행자 조건을 강화하는 게 급선무다. 공탁금, 지급 보장 등 소비자 피해를 구제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숙제다. 상품권 발행자가 부도가 나거나 상품권 유통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경우 시장 질서가 무너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김영균 대진대 교수는 “신세계 위조 사건은 상품권 발행의 가이드라인만 있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라면서 “이런 식으로 상품권이 시장의 신뢰를 잃으면 상품권의 좋은 기능까지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상품권의 규제 범위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상품권의 법제화를 막아선 안 된다는 게 김 교수가 보는 시각이다. 기업의 주장대로 상품권의 법제화는 새로운 규제를 만드는 게 아니다. 상품권 시장이 혼탁해질 우려가 있으니 이참에 규칙을 제대로 세우자는 거다. 언제까지 연 10조원 규모의 시장을 무법지대로 놔둘 순 없는 노릇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꼭 필요한 작업이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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