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찬의 프리즘 | TPP, 실기론과 속도조절론 사이

▲ TPP 가입 문제는 필요성이 있지만 조급해하다간 비싼 입장료를 부담할 수 있으므로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사진=뉴시스]
지난 5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공방이 뜨겁다. ‘왜 진작 참여하지 않았느냐’ ‘일본은 신났는데, 한국은요?’라는 식의 실기론失期論이 급부상했다.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GDP의 40%에 이르는 최대 경제블록이 탄생하자 갑자기 남의 떡이 커 보였는가.

늘 이런 식이다. 그동안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상대인 중국의 눈치를 보며 미적거리다가 타결됐다니 정치권도, 정부도 호들갑이다. 왜 진작 득실을 따지는 등 토론을 활발히 벌여서 국론을 모으지 않았는가. 다자 간 경제블록 형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TPP도 2005년부터 10년을 끌어온 협상이다.

국회에선 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국정감사장에서 의원들의 질타에 답변하는 과정임을 감안해도 경제부처 컨트롤타워로서 신중하지 못한 발언이다. 사실상 한국 정부의 가입 선언을 한 셈이다. ‘어떤 형태로든’ 가입하겠다며 우리 쪽 카드를 미리 보였으니 과도한 ‘입장료’를 부담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미 미국은 TPP 가입 선결 조건으로 다국적 금융기관이 보유한 고객 정보의 해외 이전, 유기농식품 인증제도 완화 등을 요구했다. 일본이라고 가만히 있을까. TPP 타결 이후 한국의 허둥대는 모습에 내심 고소해 하며 무리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높다. 다른 회원국들도 저마다 자국에 유리한 요구 사항을 추가로 제시할 수 있다. 한국이 가입을 기정사실화한 채 서두르면 ‘봉’으로 여기고 까다로운 조건을 들고 나올 것이다.

TPP 타결은 우리 통상 전략에 큰 숙제를 안겼다. 이는 우선 세계 시장에서 우리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일본이 미국과 FTA를 맺었다는 의미다. 한국은 그동안 일본에 앞서 미국을 비롯한 여러 경제권과 양자 간 FTA로 자동차 등 제조업 수출에서 경쟁력을 길러 왔다. 그런데 일본이 TPP 타결로 한 방에 여러 국가와 FTA를 체결하는 효과를 냄으로써 우리가 미국 시장 등에서 애써 확보한 과실의 일부를 두 눈 뻔히 뜬 채로 빼앗기게 생겼다.

우리가 TPP에 추가 가입한다는 것은 한ㆍ일 FTA의 우회 체결과 마찬가지다. 그동안 한ㆍ일 FTA 협상이 부진한 것은 일본이 개방에 소극적으로 임하고 우리도 누적된 대일 무역적자와 부품소재 산업의 경쟁력이 약해서였다. 두 가지 숙제 모두 정치ㆍ경제 관계에서 껄끄러운 일본과 얽혀 있다.

조급증은 금물이다. 한국은 TPP 12개국 가운데 일본과 멕시코를 제외한 10개국과 이미 FTA를 체결한 상태다. TPP 가입이 경제ㆍ사회 분야 전반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 재계라고 해서 찬성 일변도가 아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미국과 일본이 한국의 TPP 가입 대가로 우리가 받아들이기 곤란한 사항을 요구할 것이라고 염려했다. 미국으로선 한ㆍ미 FTA 협상 때 얻어 내지 못한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을 거론할 테고, 우리가 파는 것보다 사 오는 게 훨씬 많은 일본에는 시장을 더 열어 주게 된다는 점 때문이다.

당장 쌀 시장 추가 개방이 문제로 등장할 것이다. 일본도 TPP에 가입하면서 미국산 무관세 쌀 수입 물량을 늘렸다. 최경환 부총리는 쌀을 시장 개방의 예외로 두겠다지만 희망 사항일 뿐이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 축산 강국들은 쇠고기 시장 추가 개방을 압박할 수 있다. 농축산물 시장 추가 개방이란 입장료를 부담하면서까지 TPP 가입으로 이익을 얼마나 낼지는 따져 볼 일이다.

큰 틀의 협상은 타결됐다. 하지만 후속 세부 합의와 각국의 의회 비준을 거친 TPP 발효까진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가입의 필요성은 있지만 정신없이 서두르지 말고 냉철하게 접근해야 한다. ‘어떻게든 가입’하겠다며 덤비다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클 수 있다. 조건과 시기를 꼼꼼히 따져서 국익을 극대화하는 ‘치밀한 가입’ 전략부터 마련하라.
양재찬 더스쿠프 대기자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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