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 김정덕 기자
  • 호수 161
  • 승인 2015.10.15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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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 화법으로 풀어 본 상품권

▲ 상품권은 돈과 똑같은 기능을 하지만 발행 기업 외에는 유통량을 파악할 길이 없다.[사진=뉴시스]
선물로 뭘 사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종종 상품권을 이용한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마음이 편하고 깔끔하다.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품권에 숨은 속성을 살펴보면 찜찜한 구석이 많다. 발행 규모와 유통 경로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렵다. 베일에 싸인 상품권의 흐름을 1인칭 화법으로 살펴봤다.

나(상품권)는 시중에 유통되는 돈과 똑같다. 내 얼굴에 5만원이 찍혀 있으면 5만원어치 제품, 10만원이 찍혀 있으면 10만원짜리 제품을 각각 살 수 있다. 일정한 액수 이상을 사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거스름돈을 받을 수도 있다.

특별한 인쇄소에서 찍는 돈과 마찬가지로 나는 아무 인쇄소에서나 만들지 못한다. 고급 용지와 특수 잉크를 사용해야 한다. 나만의 일련번호도 있다. 돈과 똑같기 때문에 선물용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물가가 오를 땐 인기가 더 많다. 이번 추석에도 내 활약은 컸다. 추석 선물로 나를 택한 기업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유통 기업이 상품권 좋아하는 이유

돈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때도 있다. 돈은 지갑에서 나뒹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이 나를 별도의 종이봉투에 넣을 정도로 애지중지한다. 액면가가 높을수록 종이봉투의 질도 좋아진다. 많은 사람의 손을 타지도 않는다. 나를 사용하면 대부분 상품으로 교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끗하다. 세상 구경을 오래 하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지만 그만큼 고결한 대접을 받을 수 있어 괜찮다.

 
그런데 유통 기업들이 나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나를 발행하는 것만으로도 자금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5000원에 샀다고 치자. 나를 발행한 유통 기업은 5000원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이 돈으로 유통 기업은 투자를 하거나 이자수익을 올린다. 이뿐만이 아니다. 소비자가 나를 분실하면 유통 기업은 제품을 팔지도 않고 돈을 남길 수 있다. 말 그대로 마진율이 100%인 셈이다.

이처럼 유통 기업은 나를 발행하는 것 자체로 득을 본다. 더한 경우도 있다. 일부 기업은 법인카드를 사용, 나를 다발로 산다. 개인카드로는 나를 무작정 살 수 없지만 법인카드는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발로 매입한 나를 되팔아 현금을 만들고, 비자금으로 쓴다.

보관용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나를 구입한 뒤 되팔아 현금화하는 게 아니라 그냥 놔두는 것이다. 언제든 현금화 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는 거다. 이 경우 나는 밝은 빛을 볼 수 없다. 뭉텅이째로 컴컴한 어둠 속에서 긴 잠을 잘 뿐이다. 사용처도 어둡다. 돈이 아니기 때문에 탈세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내 주인의 가족에게 편법 증여되기도 한다. 이럴 때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세탁됐다’고 말하지만 결코 깨끗하지가 않다.

나쁜 데 사용되기도 한다. 일부 기업이 나를 하청업체 결제 수단으로 이용하는 건 대표 사례다. 하청업체로선 돈을 만들기 위해 나를 할인하는 순간 손해다. 할인율 탓에 대금이 깎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을’의 땀과 눈물을 짜내는 미운 오리새끼라는 욕을 먹기도 한다. 현금이 필요한 일반인도 나를 이용한다. 일명 상품권 깡이다. 신용카드로 나를 산 후 되팔아 현금을 만드는 식이다.

 
지하경제에서 유통되는 상품권

기본적으로 나는 ‘유통기업→소매상→소비자 또는 기업’을 거쳐 결국 처음 태어난 유통 기업으로 돌아온다. 이런 인생은 파쇄기에서 마감한다. 하지만 생을 마감하기 전의 내 친구들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주인에게 기쁨을 선사한 대가로 사랑을 듬뿍 받아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밝은 빛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친구도 있다. ‘경제 살리기’라는 큰 포부를 안고 유통됐다가 되레 지하경제에 활력만 불어넣었다며 맥이 빠져서 풀이 죽어 있는 친구도 있다. 

문제는 내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내 친구가 몇 명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거다. 나만 모르는 것도 아니다. 세상도 모른다. 나를 찍어 낸 기업의 상품권 담당자와 책임자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IMF 외환위기(1997년) 이후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촉진한다는 취지에서 상품권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상품권이지만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되는 존재다. 상품권의 ‘비애悲哀’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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