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 국세가 위태로웠지만 조선 조정은 당파싸움에만 열을 올렸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1596년 9월 2일 대판大阪(오사카)에서 풍신수길의 일본국왕 책봉식이 거행됐다. 책봉식에 등장한 풍신수길은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아마도 배례나 절을 하기 싫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풍신수길은 책봉을 받으면서도 부복俯伏(고개를 숙이고 엎드림)은 하지 않았다.

책봉사절의 종사관 격에 불과한 심유경은 무슨 흉계를 품었는지 다른 일행을 부산에 떼어 두고 소서행장의 뒤를 따라 일본으로 들어갔다.  일본 땅에 들어간 심유경은 자신이 책봉사절이나 되는 듯 북경에서 비밀리에 가져온 중국의 문관 예복을 내어 입었다. 그러곤 덕천가강, 모리휘원 등 풍신수길의 부하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녔다.  태합 풍신수길에게는 환심을 사기 위해 망룡포(곤룡포), 옥대, 익선관, 명나라 지도, 무경칠서를 개인 명의로 보냈다.

또한 풍신수길 휘하의 요인들에게는 책봉 정·부사보다 자신이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보물과 금은을 보냈다. 이렇게 풍신수길과 그 부하들의 환심을 산 심유경은 일본 미녀를 시첩으로 두는 등 향락 생활을 했다. 그러는 동안 부산에 있던 명나라의 풍신수길 책봉정사 이종성에게는 무시무시한 사건이 생겼다. 책봉 준비를 하러 간다던 심유경과 소서행장의 소식이 몇 달째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만 부산으로 오면 철병을 한다던 일본 군대 역시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일본의 한 지인으로부터 한 서신이 도착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판에서 지진이 일어나 책봉을 받으려 한 복견성伏見城의 궁궐이 무너져서 궁녀 400명이 압사당하고 그 밖에도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어서 풍신수길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 아니하기로 태도를 표변하였다 합니다. 귀하가 만일에 바다를 건너 일본에 오면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심유경도 옥중에 감금돼 있어서 벌써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이종성을 미워한 심유경의 계략이었다. 이종성은 명나라 개국공신 이문충李文忠의 자손이다. 임회후라는 후작을 대대로 세습, 문벌이 높다. 이 때문에 그는 심유경을 일개 부랑자로 대접했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꾸짖기를 예사로 하는 까닭에 심유경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런 서신을 보낸 것이었다.

심유경 계략에 도망간 책봉정사

어찌됐든 이 말을 듣고 겁을 잔뜩 먹은 이종성은 그날 밤 군사로 변장하고 울산의 일본 성채를 떠났다. 이튿날 아침에 책봉정사 이종성이 달아난 것이 발각되자 일본 사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소서행장이 일본을 다녀 와서 책봉 정·부사를 본국에 데리고 가면 자신들도 조선 땅을 떠날 것으로 고대해 왔기 때문이다.

▲ 조선의 책봉사절 일행은 풍신수길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런데 며칠 후 소서행장이 돌아왔다. 책봉정사 이종성이 달아났다는 보고를 받은 명나라 조정은 부사 양방형을 정사, 심유경을 부사로 각각 승직시켰다. 이때 심유경이 조선 조정에다 일본에 통호사通好使를 보낼 것을 청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화의를 원치 않았으므로 거절하였지만 대국의 사신이 자꾸 조르는 통에 부득이하게 사신을 보냈다. 심유경의 접반사인 황신이 정사, 대구부사 박홍장朴弘長이 부사를 각각 맡아 명나라 책봉사절과 동행했다.

1596년 9월 2일 대판에서 풍신수길의 일본국왕 책봉식이 거행됐다. 명나라 책봉사에게 자랑하기 위해 복견성 안에 짓던 궁궐이 대지진에 무너졌지만 풍신수길은 거대한 가궁전假宮殿을 다시 짓고 책봉식을 열었다. 이날 책봉정사 양방형은 앞에 서고 부사 심유경은 금으로 조각한 일본왕의 인장을 들고 뒤를 따랐다. 일본 측에선 덕천가강, 모리휘원 등 제후들이 벌여 섰다.

예식이 시작되매 풍신수길이 지팡이를 짚고 청의 동자들을 뒤에 세우고 식장에 나왔다. 무릎이 아프다 하여 지팡이를 짚은 것이었다. 배례는 무릎이 아파서 행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댔다.  풍신수길이 나오니 모인 사람들이 모두 엎드렸다. 책봉 정·부사도 위엄에 겁이 나서 엎드렸다. 풍신수길은 명나라 사절이 자기 앞에 굴복하는 걸 보고 웃더니 “이리로 오라”고 말하였다.  마치 상국 군왕이 하국 사신을 부르는 것처럼 명령을 했다. 소서행장이 풍신수길에게 “천조天朝에서 온 사신을 우대해야 합니다”고 말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유경은 일어나 풍신수길의 앞에 나아가서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금인金印과 왕복을 줬다. 또한 풍신수길의 신하 가운데 덕천가강·직전신웅·전전리가·모리휘원·부전수가·상삼경승上杉景勝(우에스키 가게카쓰)·소조천수추小早川秀秋(고바야카와 히데아키)·흑전효고·생구친정·중촌일씨中村一氏(나카무라 가즈우지) 등 10인에게는 도독, 굴미길청堀尾吉晴(호리오 요시하루)·천정장정·증전장성·석전삼성·협판안치·도진의홍·소조천융경·가등청정·소서행장·구귀가륭 등 10인에게는 아도독, 장속정가·전전현이前田玄以(마에다 겐이)·흑전장정·과도직무·이달정·장종아부원친·가등광태·종의지·가등가명·대우의통·송포진신·등당고호·봉수하가정·입화종무·천야행장淺野幸長(아사노 요시나가) 등 15인에게는 도지휘사, 기타 15인에게는 아지휘사의 관작과 인장을 주고 관복과 칙유문勅諭文을 주었다.

그 후 심유경은 풍신수길에게 부복하여 듣기를 청했다. 하지만 풍신수길은 “각기병으로 무릎을 꿇지는 못한다”며 몸을 굽히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엎드려서 책봉조칙을 들었다. 奉天承運皇帝 制曰 聖仁廣運 凡天覆地載莫不尊親 帝命溥將 暨海隅日出罔不率俾 昔我皇祖 誕育多方 龜紐龍章 遠錫扶桑之域 貞珉大篆 榮施鎭國之山 嗣以海波之揚 偶致風占之隔 當玆盛際 宜讚彛章 咨爾豊臣秀吉 崛起海邦 知尊中國 西馳一介之使欣慕來同 北叩萬里之關懇求內附 情旣堅於恭順 恩可靳於柔懷 玆特封爾日本國王 錫之誥命 於戱 寵賁芝函襲冠裳於海表 風行卉服 固藩籬於天朝 爾其 念臣職之當修恪循要束 感皇恩之已渥無替款誠 祗服綸言 永尊聲敎 欽哉 萬曆 二十三年1) 正月 二十一日 御寶御符捺着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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