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 국세가 위태로웠지만 조선 조정은 당파싸움에만 열을 올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명나라가 풍신수길을 일본왕으로 봉하자 풍신수길은 불쾌한 심경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60여주를 통일한 이상 자신이 사실상 일본왕인데 누가 일본왕으로 인정을 하느냐는 거였다. 풍신수길의 분노가 갈수록 커질 무렵 조선은 ‘뇌물 정국’에 휘말리고 있었다.

풍신수길에게 하달된 책봉조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그대 풍신수길은 섬나라에서 나서 중국을 높일 줄 알고 만리의 관문을 두드려 복종해서 따르기를 간절히 구하매 그 공손한 정이 이미 굳은지라 은혜를 베풀어 품을 수 있도다. 이에 따라 특별히 그대를 일본국 왕으로 봉하여 고명을 하사하는 도다. 조서를 꾸며 은총을 내리나니 바다 바깥에서 의관제도를 물려 받아 오랑캐들에게 행해지도록 하여 굳건히 천조의 울타리가 되도록 하라. 그대는 신하의 직분을 맡았음을 유념하여 삼가 좇고 단속하며 황은이 분에 넘침을 새겨 이 정성이 변치 말지어니 다만 황명에 복종하고 황상의 가르침을 길이 따르도록 하라.

이튿날 풍신수길은 명나라에서 내린 일본국 순화왕順化王의 망룡포를 입고, 익선관을 쓰고, 옥대를 차고, 적석을 신고서 책봉사 일행을 위한 연회에 참석했다. 휘하 제후들도 각기 품계를 따라 명나라 조정에서 내린 관복을 입고 풍신수길의 뒤를 쫓았다.

잔치를 파한 뒤 풍신수길은 글을 잘 쓰는 태장로兌長老, 철장로哲長老 등을 불러들여서 명나라 황제가 보낸 책봉문을 일본말로 번역하여 읽으라 했다. 책봉문을 듣던 풍신수길은 “너를 일본왕에 봉하노니” “신하되는 직분을 닦아야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화를 냈다.

하여간 이번 책봉으로 명나라와 일본은 화의를 맺었다. 하지만 조선과 일본의 화의는 아직 체결되지 않았다. 풍신수길은 조선에서 온 사신의 벼슬이 낮다는 이유로 보기를 거절하였다. “내가 포로로 잡힌 두 왕자를 놓아 보냈거든 조선도 왕자를 보내 사례를 해야 옳지 않은가. 그런데도 미관말직을 보내도 되나?”

그럼에도 조선과 화의를 해야 전쟁을 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 평조신은 수길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조선 사신도 차제에 만나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이 말을 들은 수길은 분기를 참지 못했다. “조선이 왕자를 사신으로 들여보내기 전에는 만날 생각이 없다.” 그러면서 소서행장 등 강화파에게 소리를 질렀다.

농락 당한 수길의 분노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명나라에서 나를 봉왕한다더니 명나라에 속한 지방을 주면서 봉왕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일본 나라의 왕이 아니냐. 내가 일본의 60여주를 통일한 이상에는 사실상 일본왕인데 명나라 황제가 봉왕하기를 기다릴 것이 있느냐. 모두 너희 놈들의 농간이야!”

풍신수길은 이번 책봉식이 자신에겐 아무런 소득이 없고 5~6년 동안 원정군을 보낸 게 허사가 됐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조선의 남삼도를 할양하겠다’는 책봉의 조건이 말뿐이라는 사실도 눈치 채고 모욕감을 느꼈다. 책봉사절 일행은 다시는 수길을 만나지 못했다. 수길이 대명황제에게 올릴 사은표라는 회답문도 받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조선통신사 황신은 ‘일본과 화의를 못했다’ ‘풍신수길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는 판단을 토대로 조정에 “일본 대군이 움직일 것”이라고 보고했다.

▲ 일본왕 책봉이 명나라의 농간이라고 생각한 풍신수길은 또다시 조선 침략을 준비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 보고를 받은 선조는 눈물을 흘리며 이원익을 우의정 겸 도체찰사로 삼아 적군을 막을 방책을 맡겼다. 이원익은 적과 싸울 힘이 없는 이상에는 청야전술(성 안에서 방어하면서 성 밖의 마을을 비우고 식량을 없애 적의 보급로를 길게 만드는 전술)을 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영남ㆍ호남ㆍ호서 3도의 인민과 곡량을 각 산성으로 옮겨 놓고 적이 오더라도 군량을 어쩌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소서행장과 요시라와 여러 번 만나면서 많은 뇌물을 받았다. 선조는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엄히 견책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사실 김응서뿐만이 아니었다. 알고 보면 도원수 권율과 명 제독 유정의 무리도 가등청정 등을 통해 뇌물을 받았다. 하지만 서로西路 출신인 김응서만 견책을 받았다. 그 엄견책의 칙유문은 이러했다.

王若曰 禍慘國家 讐在宗社 尙未迅掃妖氛 孰不扼腕腐心 卿以對壘之將 不奉朝廷命令 擅對賊面 敢述悖逆之辭 累通私書 顯有尊媚之態 修好講和之說 小無顧忌 自陷罪辟 予甚怪駭 卿其改心惕勵 毋貽後悔 云云.

왕이 말한다. 참화가 국가에 닥치고 원수가 종묘사직을 범하였는데도 아직 그 요망한 기운을 쓸어버리지 못하였으니 누가 팔을 걷고 부심하지 않겠는가? 경은 적과 대치하고 있는 장수로서 조정의 명령을 받지 아니하고 멋대로 적과 만나 감히 패역한 말을 하고 사사로운 편지를 교환하며 아첨하는 태도를 보였다. 강화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도 꺼리는 바 없이 행동하여 스스로 허물에 빠졌으니 내 생각에 몹시 해괴하다. 경은 마음을 고쳐먹고 조심하여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하라.

뇌물 받고 일본과 내통한 조선군

김응서는 적군과 싸우길 두려워했다. 적의 뇌물에도 마음을 빼앗겼다. 김응서뿐만 아니라 권율과 임유정도 이런 허물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 무렵 삼도통제사 이순신은 김응서가 조정의 견책을 당한 얘기를 들었다. 도원수 권율도 김응서가 사신 요시라와 왕래하면서 교섭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순신은 알고 있었다.

순신은 분개하고 한탄함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하되 김응서란 사람은 과오를 뉘우치거나 고치려 할 사람이 못 되니 장래에 또 무슨 사달을 저지를지 염려하였다. 난중일기에는 “김응서가 만약 사람이라면 조정의 엄책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라고 적혀 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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