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친구 ❹

▲ 동수가 준석을 배신한 건 준석이 조직 논리가 아닌 패거리 논리로 동수를 대했기 때문이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 ‘친구’는 조폭영화로 구분된다. 조폭은 조직폭력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영화 속 준석(유오성)과 그 무리의 행각은 ‘조직폭력’과 거리가 멀다. 고교시절 준석과 동수(장동건), 중호(정운택), 상택(서태화)은 도루코(김정태)의 주선으로 여고생 밴드 멤버들과 골방에서 칙칙한 미팅을 갖는다. 동수와 상택은 밴드의 리더 진숙에게 관심을 갖는다. 준석은 우두머리의 직권으로 진숙을 동수가 아닌 상택에게 ‘하사’한다.

패거리의 2인자로서 준석을 도와 ‘살벌한 전장’을 누빈 동수는 배알이 뒤틀린다. 급우들의 평가대로 준석은 학교 ‘통’이고 동수는 ‘부통’이다. 반면에 모범생 상택은 초등학교 친구일 뿐 준석과 동수가 ‘깡패의 길’로 들어선 이후로는 별다른 교분이 없었다. 조직 논리가 적용된다면 진숙은 당연히 동수의 몫이어야 했다.

곧이어 동수와 준석의 인상 깊은 ‘화장실 담판’이 벌어진다. 동수는 도끼눈을 뜨고 준석에게 이렇게 말한다. “상택이한테 와 그라는데?” 답변은 간단하다. “친구 아이가!” 자리를 뜨려는 준석의 어깨를 잡으며 동수가 다시 따진다. “그럼 내는 머꼬? 니 시다바리가?” 준석은 무표정하게 살벌한 한마디를 날린다. “죽고 싶나?”

문제는 동수는 ‘조직 논리’를 말하는데 준석은 ‘패거리 우두머리’로서 대답한다는 점이다. 준석에게 동수는 조직의 2인자가 아니라 ‘내 패거리’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이후 동수의 마음은 준석을 떠난다. 동수가 준석이 몸담은 조직과 대척점에 있는 조직에 가담, 비극의 종말로 치닫는 이유의 근본이 여기에 있다. 결국 비극의 1차 책임은 ‘조직 논리’가 아닌 ‘패거리 논리’를 갖다 댄 준석에게 있는 셈이다.

준석이 우연히 택시를 타고 가던 상택이를 만나 식당에서 술잔을 기울일 때도 마찬가지다. 준석은 상택에게 자신을 ‘건달’이라고 정의하고, 그 세계의 가치관을 두서없이 늘어놓는다. 술기운에 간이 부은 상택이 말한다. “그래 봐야 느그는 결국 깡패인기라!” 맞는 말이다. 건달은 술과 고기의 향香만 먹고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음악을 관장한다는 신 ‘건달바乾達婆’를 뜻하는 불교용어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됐는지 알 수 없지만 깡패를 지칭하는 용어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자 옆 테이블에서 절도 있게 식사를 하고 있던 준석의 하수인 두 명이 불쾌한 표정으로 상택을 쏘아본다. 준석은 즉각 그들을 불러 식사를 중단시킨다. 우두머리의 친구를 쏘아봤다는 이유로 차 트렁크에 들어가 반성하라는 처분을 내린다. 상택은 준석의 친구일 뿐 조직과는 무관하다. 조직을 모욕하는 외부인에게 조직원이 불쾌감을 나타내는 건 당연하다. 처벌의 대상도 아니다.

한때 조폭 세계에 있던 한 인사에 따르면 그 세계에서 차 트렁크는 ‘시체 운반 전용 공간’이다. 따라서 그곳에 들어가게 한다는 건 사실상 죽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준석이 동수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조직의 동료’가 아니라 ‘하수인’으로 취급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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