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87)

풍신수길은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일본 제장에겐 고민거리가 있었다. 이순신이었다. 그나마 영리한 소서행장은 정탐을 통해 순신의 군비와 실력을 알아보았다. 순신은 삼남 각 요해처에 거미줄같이 철쇄鐵鎖, 포대砲臺, 망대望臺, 봉수대烽燧臺와 군비병軍備兵을 두고 있었다. 물 한 방울조차도 샐 틈 없는 방비였다.

▲ 패잔한 적군들은 이순신의 병선을 바라보고 통곡했고, 이순신은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왔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1597년 1월 일본의 풍신수길은 명나라 책봉을 받은 게 형식에 불과했다고 여겼다. 더욱이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한 수모를 갚지 못하면 일본제국의 위신을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풍신수길은 부전수가, 가등청정, 소서행장 등 장수에게 1000척의 병선과 14만의 대군을 주어 1597년 1월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 조선에선 이를 정유재란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경장역慶長役이라 한다. 원정군의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선봉 제1진
주계두主計頭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 1만인

선봉 제2진
섭진수攝津守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 7000인
대마수對馬守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 1000인
형부소보刑部小輔 송포진신松浦鎭信(마쓰라 시게노부) 3000인
수리대부修理大夫 유마청신有馬晴信(아리마 하루노부) 2000인
대촌희전大村喜前(오무라 요시아키) 1000인
대화수大和守 오도순현五島純玄(고토 스미하루) 700인

제3진
갑비수甲斐守 흑전장정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 5000인
모리승신毛利勝信(모리 가쓰노부) 2000인
도진풍구島津豊久(시마즈 도요히사) 800인
고교원종高橋元種(다카하시 모토타네) 600인
추월종장秋月種長(아키즈키 다네나가) 300인
민부대보民部大輔 이동우병伊東祐兵(이토 스케타카) 500인
궁내대보宮內大輔 상량뢰방相良賴房(사가라 요리후사) 800인
중부대보중서中部大輔中書 협판안치脇坂安治(와키자카 야스하루) 1200인

제4진
가하수加賀守 과도직무鍋島直茂(나베시마 나오시게) 1만2000인

제5진
병고수兵庫守 도진의홍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 1만인

제6진
토좌수土佐守 장종아부원친長宗我部元親(조소카베 모토치카) 3000인
등당고호藤堂高虎(도도 다카토라) 2800인
내도통총來島通總(구루시마 미치후사) 600인
관야정영菅野正影(스게노 마사카게) 700인
중천수성中川秀成(나카가와 히데시게) 1500인

제7진
아파수阿波守 봉수하가정蜂須賀家政(하치스카 이에마사) 7000인
아락두雅樂頭 생구일정生駒一正(이코마 가즈마사) 2400인
좌근위소장左近衛少將 입화종무立花宗茂(다치바나 무네시게) 5000인
모리수포毛利秀包(모리 히데카네) 1000인
천야행장淺野幸長(아사노 요시나가) 3000인
입화직차立花直次(다치바나 나오쓰구) 1000인

사령司令 제8진
안예수安藝守 모리수원毛利秀元(모리 히데모토) 3만인

대장大將 제9진
비전재상備前宰相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우키타 히데이에) 1만인

참모총장은 흑전효고黑田孝高(구로다 요시타카)요, 총대장은 소조천수추小早川秀秋(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이니 당시 나이 16세였다. 소조천수추는 제10진으로 정병 2만을 거느렸다.

이렇게 총합이 15만4000여 인이었다. 총대장 소조천수추는 명호옥 행영에서 출발하기 전에 군사회의를 열고 이번 출정의 목적을 설명하였다. “한성 이북으로 출병하지 아니할 것, 전라도를 점거할 것, 남삼도의 이순신 수군을 격멸할 것.” 이 삼대 강령을 의결하고 조선의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선 먼저 이순신의 수군을 깨뜨려야 했다.

소조천수추는 전쟁 경력이 아예 없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우희다수가 이하 가등청정, 소서행장 등 장수들은 이순신을 공격하길 꺼렸다. 이에 따라 우희다수가 이하 제장들은 비밀회의를 열어서 “이순신은 싸워서 이기기 어려운 장수이니 조선 정부의 당파싸움을 이용해 반간계를 쓰는 것이 옳다”고 결정했다.

이렇게 일본 제장들은 이순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승산 없는 싸움을 하기 싫은 것이었다. 영리한 소서행장은 정탐을 통해 순신의 군비와 실력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순신은 삼남 각 요해처에 거미줄같이 철쇄鐵鎖, 포대砲臺, 망대望臺, 봉수대烽燧臺와 군비병軍備兵을 두고 있었다.

물 한 방울조차도 샐 틈 없는 방비였다. 군량과 식염, 화약, 건어물 등도 넉넉히 3~4년은 먹을 만큼 비축돼 있었다. 일본 장수들이 입버릇처럼 떠들던 “명나라는 두려워할 게 없지만 이순신은 큰 두통거리다”는 얘기가 괜한 말은 아니었다.

적의 소굴 없애는 조선 수군들

▲ 일본 제장의 첫째 목표는 이순신의 제거였다. 그만큼 그들은 이순신을 두려워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 무렵 통제사 이순신은 거제도 동단에 있는 적의 소굴을 없애기 위해 거제현령 안위와 군관 김난서金鸞瑞, 신명학辛鳴鶴 등을 불러 밀의密議를 했다. 용사 박의검朴義儉도 조용히 불러 계책을 가르쳐 줬다. 순신은 따로 군사를 거느리고 먼 곳에서 대기했다. 안위는 제장들을 인도해 병선을 몰고 돌진하였다.

용사 박의검 등 10여 인은 거지꼴을 한 채 신변에 화기火器를 감추고 출발하여 적의 소굴에 불을 질렀다. 이후 안위 등 제장들의 병선이 포구 안으로 진격해 천지현자 각양 대포를 올려 쏘았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적진은 일순간에 잿더미가 됐다. 적군의 사상자는 무수하였는데 패잔한 적군들은 순신의 병선을 바라보고 통곡하였다. 순신은 승전고를 울리고 한산도로 돌아왔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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