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신포우리만두ㆍ신포1971 대표

▲ 박혜란 대표는 2004년 터진 ‘만두파동’의 영향으로 서울 명동의 사옥을 처분하는 등 곤욕을 치렀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시작은 19.8~23.1㎡(약 6~7평)의 규모의 만두가게였다. 맛 좋은 만두에 고객이 꼬리를 물더니 ‘전통의’ 만두가게가 됐다. 이름하여 신포우리만두다. 이 만두가게의 전통을 잇고 있는 사람은 창업자의 딸 박혜란(53) 대표다. 그는 퓨전메뉴가 가미된 신포1971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도 론칭했다. 박 대표의 성공학을 들여다봤다.

1971년 인천시 신포동에서 작은 만두집이 오픈했다. ‘우리집’이라는 상호로 규모는 19.8~23.1㎡(약 6~7평)에 불과했다. 얼마 후 이 가게는 대성공을 거뒀다. 고기만두와 쫄면의 대중화에 성공하면서 경인 지역에만 10개의 분점을 개설했다. 이렇게 탄생한 브랜드가 ‘신포우리만두’다. 신포동의 신포와 우리집의 우리가 결합해 탄생했다. 올해로 벌써 45년째다. 이런 신포우리만두와 인생을 함께 해온 이가 박혜란(53) 신포우리만두ㆍ신포1971 대표다. 창업자 고故 박기남 회장의 장녀다.

박 대표는 신포우리만두의 메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트렌드 파악이 빠른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 어머니가 가족에게 먹인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만든 것이 시작이죠. 시중에 없던 나뭇잎 모양의 만두와 새콤달콤한 쫄면을 대중화하면서 신포우리만두가 만두와 쫄면의 대명사가 됐어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서일까. 박 대표는 결혼 후에도 신포우리만두에 열정을 쏟았다. 1980년대 전북 군산에 살던 그는 군산시에 신포우리만두 매장을 오픈했다. 그곳에서 간이공장 허가를 받아 만두소와 쫄면 양념을 제조, 전북 매장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전북 김제시에 신포우리식품이 건립되기 전이었어요. 인천 본점은 경인지역 매장에 공급하고 저는 전라북도 지역에 공급을 한 거죠.”
1995년 박 대표는 신포우리만두를 본격 경영하기 시작했다. 서울지사장을 역임하면서 2000년 뉴욕 1호점 개설에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그는 직영점 중심의 매장을 개설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렇다고 승승장구만 했다는 건 아니다. 2004년 터진 ‘만두파동’으로 서울 명동의 사옥을 처분하는 곤욕을 치렀다. 간신히 뉴욕에 오픈한 1호점과 2호점도 이 무렵 문을 닫아야 했다.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탓이었다.

박 대표가 ‘재기의 날개’를 편 건 2000년대 중반부터다. “트렌드에 걸맞은 새로운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만든 게 ‘신포1971’입니다. 신포우리만두의 메뉴의 장점을 살리면서 돈가스와 다양한 쫄파스타, 모모 등의 퓨전요리를 강화했죠. 이 때문인지 어린이부터 중장년층까지 고객폭이 한층 넓어졌어요.”

신포1971의 매장은 현재 4곳이다. 18년간 신포우리만두로 영업하던 강남직영점을 리뉴얼하고, 아현점, 안암점, 롯데백화점 중동점을 오픈했다. 고객 반응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특히 신포우리만두와의 시너지 효과가 쏠쏠하다. “신포우리만두는 전통의 맛을 즐기려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매장이죠. 반면 신포1971은 새로운 메뉴를 원하는 고객에게 제격입니다. 소비자 기호에 따라 선택이 가능해 시너지가 나고 있습니다.”

박 대표의 경영철학은 ‘겸손이 미덕’이다. 아버지에게 받은 교훈이다. 그는 “1971년 아버지가 작은 만두가게를 열었을 때의 마음으로 고객에게 품질 좋은 음식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초심初心’으로 신포우리만두와 신포1971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박 대표의 도전은 지금부터다.
이호 더스쿠프 기자 rombo7@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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