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멘토링 (17) 김욱 작가 편

‘100세 시대’라지만 일흔의 나이에 번역가의 길에 들어섰다. 15년 간 200여권의 책을 번역했고 10권의 저서를 냈다. 지난해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를 낸 김욱(85) 작가는 “길들여지기를 강요하는 동물원 같은 세상을 탈출해 야성을 회복하라”고 청춘을 ‘선동’했다.

▲ 김욱 작가는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면서 “그러려면 사람들이 내게서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내게 부족한 건 뭔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사진=지정훈 기자]
Q 멘티가 멘토에게

 넘어서기엔 너무 힘들어 보이는 벽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의 준말). 실력보다 운이 좌우하는 상황 같은 것. 노력해서 실력을 쌓는다고 이런 상황이 해소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있나요? 그래도 실력을 쌓아야 하나요?

A 멘토가 멘티에게

여러분 또래였던 20대에 난 한국전쟁을 겪었습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죽느냐 사느냐뿐이죠.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나오는 햄릿의 대사)가 아니라 살아남느냐 여기서 죽어 없어지느냐의 생존 게임입니다.

만 스무살 소설가를 꿈꾸는 국문학도였던 나는 서대문교차로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돼 의용군으로 끌려갔습니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끝에 이번엔 국군에 징집됐죠.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전쟁이라는 극한의 환경은 극복할 수 없어요. 나이 칠십엔 전 재산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됐습니다. 이 두 가지가 ‘넘사벽’ 맞죠?

여러분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하지만 당시 고희(70세)를 맞은 나는 달랐습니다.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들이 이럴 때 좌절합니다. 그런데 난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한번 도전해 볼 수 있겠다. 실패한들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테니.’ 역발상이죠.

다행히 난 일본어를 좀 했습니다. 나는 나의 일본어 실력이 책을 번역할 만한 수준이 되는지 시험해 봤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200여권의 일본 책을 번역 출간했습니다. 설사 스스로 부과한 시험에서 탈락했더라도 그게 부끄러워할 일은 아닙니다.

 
흔히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는데 운을 무시할 수는 없죠. 하지만 돌이켜보면 운이 좋았던 때와 나빴던 때의 빈도가 거의 비슷합니다. 말하자면 서로 상쇄됐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운의 비중을 따지는 건 무의미합니다. 나의 운도, 남의 운도 결국 거기서 거기죠.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결국 실력입니다. 그런 뜻에서 난 ‘운영기십’이라고 봅니다.

실력은 지위, 나이 심지어 계급도 초월합니다. 실력만 있으면 반드시 쓰임새가 있습니다. 반대로 실력이 없으면 쓰려고 해야 쓸모가 없습니다. 실력을 꾸준히 쌓으려면 실패 경험을 많이 하면 됩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동안 겪는 실패가 중요합니다.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인정받으려면 사람들이 내게서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내게 부족한 건 뭔지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도 알고, 어떤 상황에서 날 인정하지 않는지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천에서 용 나기가 과거보다 어려워졌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이는 면도 있겠죠. 하지만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기대치가 높아져 만족을 못하는 건지도 몰라요. 내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패배의식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노력한 만큼 기회가 없을까봐 지레 변명거리를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나는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 나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선택, 리스크가 가중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리스크도 닥치기 전에 미리 파악하면 겁날 게 없습니다. 많이 얻으려면 내 것을 많이 내줘야 합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이 더 굳세집니다. 사람은 시련을 견딜 때 성장합니다. 그렇다면 시련이 닥치기 전에 내가 먼저 다가서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 않습니까?

사노라면 어쨌든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은 게 인생살이입니다. 출발점이 마이너스면 제로 지점만 통과해도 플러스의 인생입니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갖고 싶은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뭘 가장 잘하는지, 잘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요. 거기서 시작하세요. 거기에 천착하세요.

나라는 존재는 늘 변합니다. 그 변화가 때로는 실망스러울 때도 있겠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어느 날 자신을 괄목상대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85세 노작가가 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그런데 왜 그렇게 패기들이 없습니까? 패기는 될 대로 되라는 생각,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방임적 태도에서 나옵니다. 인생을 너무 규격품처럼 살려고 하지 말아요. 학벌은 이러이러해야 하고, 연봉은 얼마 이상이라야 하고, 어디어디에 살고, 아파트는 몇 평 이상이라야 하고. 거기에 미달하면 루저 인생입니까? 그 나이에 못할 일이란 없습니다. 안 되는 일도 없죠. 전쟁이 벌어지거나 천재지변을 당하지 않는 한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에 갇힌 동물은 짝짓기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종족 보존의 본능을 잃어가는 것이죠.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건 동물원 같은 세상에 여러분이 길들여졌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정히 마음에 안 들고 답답하면 벗어나는 길도 있어요. 본능에 충실한 삶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지난해 나는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란 책을 냈습니다. 꿈이 있는 인생은 나이와 무관합니다. 반대로 꿈을 잃으면 생물학적 나이가 20대라도 죽은 목숨입니다. 나는 남들이 운전대를 놓는 65세에 난생처음 핸들을 잡았고 세 번 만에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주행시험에서 시동을 꺼트려 또 떨어졌지만 지금 고속도로를 평균 시속 120㎞로 달립니다.

일어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저술에 손을 대 지금까지 10권의 저서를 냈습니다. 작가가 된 거죠.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드라마는 대단원이 감동적이라야 합니다. 인생이라는 드라마의 절정도 어쩌면 황혼인지 모릅니다.

인생을 한 권의 책에 비유할 수도 있어요. 시작은 그저 그런데 뒤로 갈수록 깊어지고 인상적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위인들의 삶만 위인전이 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 범부의 인생도 마지막에 책장을 덮을 때 감동이 밀려오고 여운이 남아야죠.
이필재 더스쿠프 대기자 stolee@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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