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vs 2015년 후퇴한 민생

▲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민생법안을 덮어 버렸다.[사진=뉴시스]
12월 9일을 기점으로 올해 정기국회 회기가 끝난다. 하지만 정기국회 회기에 국회가 한 일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각종 민생법안을 쌓아놓고 처리하지 않아서다. 이들 법안은 내년 국회의원 임기만료로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국회가 제 일을 못한 원인이 뭘까. 답은 뻔하다. 애먼 곳에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이다.

“IMF 외환위기 못지않게 먹고살기 힘들다.” 2004년 서민들의 입에서 나오던 얘기다. 2015년 서민들은 이렇게 말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서민들은 먹고살기 힘들다는 얘기다. 국회의원들이 그토록 민생을 외치면서 발로 뛰어다닌다는데 이런 얘기가 나오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겉으로는 민생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민생을 철저히 외면해서다.

2004년 2월. 16대 국회의 마지막 임시국회가 열렸다. 산적한 법안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16대 국회에서 의원입법과 정부입법 형태로 국회에 제출된 법안은 총 2507개. 하지만 이 중 처리된 법안은 1753개였다. 754개는 부결되거나 폐기됐다.

처리된 일부 법안조차 임시국회 회기 막판에 가서야 가결된 게 대부분이다. 공무원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공무원노조 설립 운영법률 제정안, 석유대체연료 관리제도를 도입하는 석유사업법 개정안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법안을 처리하려다 보면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다. 심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법안이 온전할 리 없었다. 일례로 공무원노조 설립ㆍ운영법은 ‘노조는 설립하되 파업은 불허’라는 단서조항을 달아 있으나마나 한 법이 돼 버렸다.

 
자동 폐기된 법안 중에는 모든 국회의원이 늘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민생법안도 끼어 있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계좌추적권을 3년간 연장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확대하는 기금관리법 개정안, 민간 아파트 분양원가를 공개하는 건축법 개정안 등이 대표적이다. 결국 임기만료 폐기된 법안은 40건. 이중 민생이나 경제관련 안건이 22건이었다. 일부는 17대 국회에서 재상정됐지만, 또 다른 일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국회는 지역구 의원 증원을 위한 선거구 획정 조정안은 여야 합의로 아무런 문제없이 표결 처리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국회가 제 밥그릇만 챙기고 민생을 외면한다’는 여론이 뜨거웠던 이유다. 

민생과 따로 노는 정쟁

경제상황이 안 좋으니 비판은 더 거셌다. 수출이 살아나긴 했지만 내수는 침체 일로를 걸었다. 강원도 지역은 2003년에  불어 닥친 태풍 매미 때문에 수해복구에 여념이 없었다. 4월 총선이 끝난 지 얼마 후 국회는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동의했고, 이 때문에 농어민들은 수시로 거리로 나와 울분을 토했다.

당시의 경제지표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2003년 말(11월)부터 2004년 초(4월)까지 고용률은 60%를 넘은 적이 단 한번밖에 없다. 금융시장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 기간 실업자 수는 82만명에서 86만명으로 늘었다. 생활물가지수는 80.3포인트에서 82.6포인트로 올랐다. 살림살이는 어려워지는데 생활에 들어가는 비용은 늘어났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왜 그토록 국회는 늘 강조하는 ‘민생’을 제쳐놨던 걸까.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정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핵심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었다. 주축은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과 민주당이었다. 이들은 2003년 노무현 정부 집권 초기부터 툭하면 ‘대통령 탄핵’을 거론했다. 그러다 한나라당이 다수당의 지위를 이용해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 문제를 파헤쳐야 한다며 특검법을 단독 처리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에 먼저 맡기는 게 순서”라면서 법률안 거부권을 발동했다.

 
노 대통령이 같은 해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공산당이 허용될 때 민주주의가 완성된다“고 말한 것, 이후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출신 정당인 열린우리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 등으로 인해 한나라당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다. 야권이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노 대통령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했고, 선관위는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놨다.

이를 빌미로 조순형 당시 민주당 대표는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으면 탄핵한다”고 엄포를 놨고, 노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자 이 말은 현실이 됐다. 결국 집권 초기부터 거론했던 탄핵이 현실로 나타난 셈이다. 1700여건의 법안 중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법안들이 임기만료로 폐기된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프레임을 만들었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거기에 끌려다녔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2015년.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여야가 민생법안은 제쳐두고 정쟁만 하고 있어서다. ‘탄핵’을 대체한 프레임은 바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다. 이 프레임을 만든 주인공 역시 ‘탄핵’의 핵심에 있던 박근혜 대통령이자 새누리당이다.

국민경제 상황이 안 좋다는 점도 똑같다. 한국은행의 연도별 어음부도업체 수와 부도금액을 비교해보면 2003년 기준 총 부도업체 수는 5308개다. 하지만 2014년에는 개수가 841개로 줄었다. 경제가 좋아져서 부도업체가 줄어든 것 같지만 아니다. 부도업체 수는 줄어든 반면 부도금액이 더 커져 부도업체 1곳당 평균 부도금액이 16억원에서 72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대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일반적으로 기업 규모에 따라 고용이 비례한다고 볼 때 결코 이런 상황이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칠 리 없다. 

‘탄핵’이 ‘국정교과서’로 바뀌었다

올해 4월부터 9월까지 최근 6개월간 소비자기대지수는 98.1포인트에서 97.2포인트로 떨어졌다. 소비자기대지수는 100을 기준으로 할 때 6개월 후의 소비자 동향을 묻는 것으로 높으면 긍정적, 낮으면 부정적이라는 의미다. 지수가 낮아졌다는 건 그만큼 국민들의 체감경기가 안 좋다는 거다. 같은 기간 생활물가지수는 108.8포인트에서 109.1포인트로 올랐다. 코스피지수 역시 하락세다. 국민들이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칠 때 국회는 ‘밥그릇’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얘기다.

 
내년 4월에 총선을 앞두고 있다는 것도 똑같다. 당연히 이번 정기국회와 내년 2월에 남은 임시국회 회기가 아니면 민생법안들은 또 제대로 된 논의를 거치지 못한 채 무더기로 처리되거나 폐기될 게 뻔하다. 더구나 임시국회는 총선을 목전에 두고 있어서 큰 기대를 걸기도 어렵다. 과연 민생 등지는 국회, 국민이 만든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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