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꺼진 ‘빛거리’에 희망의 불씨 붙다
불꺼진 ‘빛거리’에 희망의 불씨 붙다
  • 김정덕 기자
  • 호수 167
  • 승인 2015.11.26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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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조명거리 옛 명성 찾을까

▲ 을지로 조명산업 활성화를 위해 진행된 을지로 라이트웨이 2015 행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사진=서울디자인재단 제공]
저녁만 되면 사람들이 발길을 끊어 음침하던 서울 을지로 조명거리에 최근 활력이 감돌고 있다. 서울디자인재단과 중구청이 상권 살리기 차원에서 다양한 조명예술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을지로 라이트웨이 2015’ 행사를 진행하면서다. 을지로는 ‘한국 조명산업의 메카’라는 과거의 명성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서울 중구 을지로 세운대림상가(이하 세운상가)는 한국 IT산업의 진원지다. 1960~1980년대 세운상가는 국내 유일의 종합가전 전문상가였다. PC시대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세운상가의 또 다른 명물은 조명상가였다. 당시로선 가장 잘나가는 ‘종합가전센터’의 주변을 크고 작은 조명가게가 밝힌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을지로가 ‘한국 조명산업의 메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전자ㆍ가전산업의 중심이 ‘용산’으로 바뀌자 세운상가 주변도 활력을 잃었다. 주변에 건설자재 가게들이 새롭게 둥지를 틀었지만 활기는 예년 같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져 건설업 경기가 꽁꽁 얼어붙은 이후엔 조명가게들조차 불빛을 잃었다. 최근엔 중국산産 조명기구가 온라인을 통해 대량 유통되면서 조명 상권은 더 위축됐다.

서울시가 올 초부터 진행 중인 ‘도심창조산업 프로젝트’에 세운상가가 포함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 13일부터 21일까지 을지로3~5가 대로변과 청계ㆍ세운상가 일대에서 진행된 ‘을지로 라이트웨이 2015’ 행사도 그 일환이었다. 조명상가가 밀집한 지역임에도 저녁 7시만 되면 상가 불이 대부분 꺼지는 이곳을 탈바꿈시키기 위해 서울디자인재단(서울시 산하 디자인전문기관)과 중구청이 진행한 첫 프로젝트였다.

 
약 5억원의 예산(서울디자인재단 4억원ㆍ중구청 8000만원ㆍ상가 2000여만원)이 투입된 행사는 꽤 풍성했다. ‘빛으로 통하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번 행사의 메인 작품은 을지로3가역~4가역 대로변을 따라 설치된 조형물 ‘러닝 투게더’였다.

사람이 달려가는 장면을 조명으로 만든 이 작품은 경기침체로 지친 시민들이 희망을 갖고 함께 달릴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조명 디자이너, 10개 대학 조명 관련 학과 학생ㆍ교수 등 50여명은 참신하고 실험적인 조명예술작품을 세운상가 주변에 전시했다. 유명 글로벌 조명업체도 이 행사에 참여했다.

서울디자인재단은 조명예술작품을 감상하러 오는 이들의 편의도 고려해 세운상가 옆에 푸드트럭 4대를 입점시켜 운영했다. 관람객들이 조명 디자이너들의 오픈스튜디오를 탐방하고 전시ㆍ시연ㆍ시식 등을 체험하게 한 ‘을지로 달빛유람’ 야간투어 프로그램, 상가들과 협의해 일부 조명제품을 최대 30%까지 싸게 판매하는 그랜드세일도 눈길을 끌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나눔관에서는 ‘조명산업의 미래 전략 및 방향’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도 개최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서울디자인재단 관계자는 “지난해 서울시가 진행한 도심창조산업의 일환이던 성수동 수제화거리 활성화 프로젝트로 성수동은 구두테마거리로 자리잡았다”면서 “활기를 잃어가고 있는 을지로 조명산업에 예술을 접목해 활성화하겠다는 시도”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그는 “향후 을지로 조명축제를 정례화하고, 2020년까지 을지로 조명거리를 시청ㆍ명동ㆍ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잇는 서울의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전략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조명산업도 중국이 잠식

행사는 ‘성공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명을 예술과 접목한다는 전략이 상인들의 욕구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당초 서울디자인재단은 이런 행사가 아닌 제품개발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범용 한국조명유통협회 회장(썬조명 대표)은 “아무리 이곳이 쇠퇴해가고 있지만 전문 기술을 갖춘 조명 관련 인력이 모여 있어 제품을 만드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서 말을 이었다.

▲ 1. 한국조명유통협회의 청계천 조명작품2. 정강화 건국대 교수의 ‘빛의 커튼’3. 푸드트럭의 ‘작은 음악회’4. 건국대의 ‘키스 을지로’5. 음악 리듬에 따라 조명이 달라지는 필립스의 ‘Light DJ’
“청계천에서 비행기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것처럼 여기 조명산업도 매한가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프랑스의 고급 조명을 카피한다는 비판을 잠재울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행사의 콘셉트가 딱 맞아떨어졌단 얘기다.

조명 디자이너들의 반응도 꽤 좋다. 정미 한국조명디자이너협회 회장은 “이번 행사를 통해 조명 재료가 다양하다는 걸 알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조명디자이너들은 조명기구를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조명을 공학적으로 설계하는 전문가다. 그래서 조명기구는 협력업체를 통해 구하는 게 일반적이다. 세운상가 인근에 나올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이번 행사를 통해 더 많은 재료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재료가 많으면 당연히 조명 설계도 풍성해진다. 잘 요리된 것들을 골라 먹다가 직접 장을 봐서 밥상을 차릴 수 있게 된 것과 마찬가지란 얘기다.”

중구청은 조명상가 인근의 빈 상가를 디자이너들에게 싼 값에 임대하는 식으로 젊은 디자이너들을 유치하기도 했다. 2년 계약을 하고 입점한 장준기 퍼블릭쇼 매니저는 “벌써 수십군데 조명상가 대표들이 샘플이나 책자를 들고 와서 ‘이런 것도 만들 수 있느냐’며 문의를 해왔다”면서 “아직 실질적인 디자인 의뢰는 많지 않지만 분위기는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행사를 체험한 관람객들의 반응도 좋다. 저녁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작품을 구경하던 한 주부는 “행사를 하는지는 잘 몰랐고, 청계천에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들렀는데 작품들을 보면서 발길을 멈추게 됐다”면서 “저녁이면 대부분의 상가에 불이 꺼져 있어서 조명상가인지도 잘 몰랐는데, 다양한 조명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스탠드 하나를 고르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는데 실물을 보지 못하니 답답했다”며 “인터넷과 비교해 가격차이가 거의 없는 것 같아 앞으로는 을지로 조명상가를 찾을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IT 접목한 조명산업 개척해야

상인ㆍ디자이너ㆍ소비자, 이렇게 3박자가 모두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활력이 된 것은 분명하다. 중요한 건 향후 을지로 조명산업이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물밀듯이 밀려오는 중국 조명산업과 기술력으로 무장한 유럽 조명산업에 맞서 ‘한국 조명산업의 메카’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느냐다.

 
한 상인은 “중국의 조명산업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며 “방향성을 잡고 경쟁력을 키워나가야겠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꼬집었다. 중국 제품보다 싸게 유럽(독일ㆍ프랑스) 제품보다 좋게 만드는 건 어렵다는 얘기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정미 회장은 “상인들의 의지에 따라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다른 산업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절대 우리가 중국의 가격경쟁력을 이길 수 없다. 유럽의 기술력을 좇는 것도 쉽지 않다. 특히 조명 기술력은 내부에 들어가는 렌즈와 반사판, 빛 구현 등에 의해 결정되는데, 우리 조명산업은 아직 그들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희망이 있다면 한국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IT와의 접목이다. 바로 사물인터넷(IoT)을 통한 차별화 전략이다. 상인들이 의지를 갖고 이 분야를 개척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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