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91)

▲ 이순신이 금부도사들에게 잡혀가자 백성들은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올 거라면서 울분을 토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항쇄를 찬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됐다. 백성들이 산야를 덮어 모여 들었다. “대감, 못 가시오. 우리를 버리고 어디를 가시오”라며 울며 길을 막았다. 그중 노인 한명이 금부도사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대감을 잡아 가시면 3~4개월이 못돼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는 적왕敵王 수길의 땅이 될 것이오.”

항쇄(죄인의 목에 채우는 형구)를 찬 이순신은 우후 이몽구, 거제현령 안위, 고성현령 조응도 등 제장을 불러 울분에 찬 군사와 백성을 타일러 진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간성(방패와 성ㆍ나라를 지키는 사람을 일컬음)으로 믿고 자기네의 부모처럼 우러르던 이순신이 아무 죄 없이 항쇄를 찬 모양을 본 백성들은 울분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금부도사들은 되레 이순신의 결박을 풀고 군복을 입히게 하려고 했다. 그러자 이순신이 호통을 쳤다. “왕명으로 결박했지 않나. 그런데 왕명을 누가 거스르려 하느냐?” 그후 이순신은 제장을 불러 진중 창고에 쌓아놓은 군량미 9900석과 화약 4000근, 기관포 300문 등 총포를 상세히 기록하여 후임자에게 인계하라고 부탁했다. 조금도 창황한 기색이 없었다.

드디어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됐다. 백성들이 산야를 덮어 모여 들었다. “대감, 못 가시오. 우리를 버리고 어디를 가시오”라며 울며 길을 막았다. 그중 노인 한명이 금부도사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통제사 대감이 아니시면 적의 수군이 조선 연해 전부를 짓밟을 것이오. 그랬다면 오늘날 상감이 조선 땅에서 평안히 앉아서 위엄을 부릴 수 있겠소? 우리 대감을 잡아 가시면 3~4개월이 못돼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는 적왕敵王 수길의 땅이 될 것이오.”

하지만 이순신은 백성들을 이렇게 타일렀다. “상감께오서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아니 갈 수 없소. 여러분의 정성은 고마우나 이렇게 길을 막으면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니 도리어 옳지 못한 일이오.”

이순신이 배에 올라 나갈 때 바다를 지키고 있던 병선과 민선에서는 일제히 통곡소리가 일어났다. 이 모습을 그리며 「이순신공세가」의 저자 회당 김기환 선생은 시 두수를 지어 영탄의 뜻을 밝혔다.

 
육지에 올라서도 민중은 몇 번이나 이순신을 포위했다. “왜 잡아가느냐, 우리 국민의 은인을!”이라며 금부도사에게 힐난을 쏟아내는 백성도 수없이 많았다. 오죽하면 금부도사들이 이순신에게 “좋게 타일러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이순신이 민중에게 “어명을 순종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라고 타이르니 길을 비켜 주긴 하나 수십리씩 따라오며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의 죄가 없는 것을 알고도 때려죽이더니 이번에는 또 우리 은인이신 통제사 대감을 잡아간다”며 분연히 떠들었다.

그 무렵 조정은 이순신의 후임을 물색하고 있었다. 원균, 이일, 이억기 등 3인이 후보였다. 이산해, 윤두수, 이항복의 무리는 그 가운데 원균을 제일로 무서운 장수라고 하여 강력 추천했고, 결국 원균이 삼도통제사에 올랐다.

요직을 차지한 원균은 이산해, 윤두수, 이항복 등 세 당상관을 찾아갔다. 이항복은 “응당 노력하여 적을 격파하라”고 권장하였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당한 수치를 씻는 것이 상쾌하다”며 말을 이었다. “멀면 편전으로 쏘고 가까우면 장전으로 쏠 것이오. 박격할 때에는 검을 쓰고 이어서 몽둥이를 쓰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지요.” 큰소리를 떵떵 친 것이다.

그러자 이항복은 “대장이 된 자가 계책을 운용하여 승리를 거두는 방법은 모르고 창검을 먼저 말하니 이는 일개 군관의 일이라”며 탄식했다. 이렇게 사람을 잘 보는 이항복이 무슨 이유로 원균을 천거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통제사에 오른 원균은 의기양양하게 미첩을 데리고 한산도에 도임하였다. 그는 먼저 순신이 있을 때 신임을 받던 부하 용사를 좌천시켰다. 그 자리는 한성 대관들에게 청탁을 받은 무식한과 부랑자에게 맡겼다. 자신은 제승당에서 밤낮으로 여자와 풍악으로 일을 삼았다. 군사의 조련과 병기의 수리 개선은 망각해 버렸다. 도임한 지 석달 만에 통제사의 미첩이 12명이라는 해괴한 말까지 나돌 정도로 삶이 문란했다.

▲ 이순신 후임으로 삼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은 방탕하게 생활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순신 떠나자 울부짖은 백성들

그 무렵(1597년 2월 3일) 이순신은 금부의 철창 안에 있었다. 서인 대관들은 선조의 친국을 반대했다. 이순신의 웅변과 큰 공이 선조를 깨우치게 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찬성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왕명을 받아 추관(죄인을 신문하는 관원)이 되었다.

추관은 삼공(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이 아니면 못 맡는 자리였지만 찬성이 추관이 되는 전례가 있었다. 영상 유성룡, 좌상 김응남, 우상 이원익은 이순신과 사사로운 정과 교분이 있다는 이유로 윤근수가 추관이 된 거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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