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불신의 경제학

경제규모 세계 11위, 우리나라 경제는 선진국 수준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나라를 선진국이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신뢰ㆍ소통ㆍ협력이라는 사회적 자본이 경제를 쫓아가지 못해서다. 철만 되면 반쪽으로 나뉘어 갑론을박을 거듭하는 우리. 당신은 옆 사람을 신뢰하는가.

▲ 우리나라가 이룩한 경제상장에 비해 사회적 신뢰도가 낮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사진=뉴시스]

선진국ㆍ중진국ㆍ후진국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경제 관점이라면 국민 1인당 GDP(국내총생산)와 경제성장률이 선진국을 결정하는 기준이다. 사회 관점에서는 질서의식, 평균수명, 사회 안전망 등이 척도다. 국민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국가별 행복지수가 중요한 기준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준 말고도 중요한 조건이 있다. ‘사회적 신뢰도’다.

필자는 몇 년 전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크리스마스 아침 가까운 해외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런데 이륙한 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회항하는 일이 발생했다. 항공기 결함이 의심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다행히 항공사가 다른 비행편을 제공했고 저녁 늦게나마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비행편이 마련될 때까지 공항대기실에서 보내야 했다는 점이다. 하루 종일 말이다. 크리스마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당연한 일이이었다. 그런데 승객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인과 외국인 관광객의 행동이 너무나 달랐다.

한국인 승객의 대부분은 항공사에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수시로 비행 일정을 확인하는 등 끊임없이 항공사를 귀찮게 하는 승객도 적지 않았다. 반면 외국인 승객은 대부분 차분히 앉아 항공사의 처리를 기다렸다. 모여서 웅성거리거나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문화 차이나 민족성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비행기가 회항하는 일을 많이 겪어 덤덤할 수도 있다. 하지만 꼭 이런 것들 때문에 행동이 달랐을까.

해답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얻을 수 있었다. 우연히 옆에 앉은 외국인과 이번 회항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고 필자는 외국인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가 운이 없었다”며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 외국인은 어찌 된 영문인지 “오히려 잘 된 일이다”고 답했다. “불편함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회항하지 않았더라면 더 큰 위험에 노출됐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공항대기실에서 외국인과 한국인의 반응이 달랐던 이유는 ‘신뢰의 차이’에 있었다.  우리는 비행기의 회항을 항공사의 실수로 여겼다. 항공사의 잘못으로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으니 억울하고 화가 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외국인 승객은 항공사가 최선을 다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했고 항공사가 혹시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잘 방지해 줬다고 믿었다.

선진국 혹은 강한 나라로 나가는 데에 있어 신뢰는 1인당 GDP보다 필수 요소일 것이다. 많은 국가들이 경제 성장을 이룬 많은 국가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지 못한 건 경제 수준에 걸맞은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탓이라는 얘기다.

한국인 vs 외국인 ‘회항 관점’

흥미로운 점은 구성원 간 신뢰가 경제적 이익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개인 간 거래, 기업 투자, 정부 정책 등 모든 경제행위 밑단에 신뢰가 깔려 있으면 비용이 적게 들고 효율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신뢰나 낮으면 모든 거래가 복잡해지고 막대한 비용이 발생한다. 지난 2012년 세계은행(WB)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회적 신뢰도가 10% 상승할 때 경제성장률은 0.8% 증가한다. 아울러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 스탠퍼드대(경제학) 교수는 “저低 신뢰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은 고高신뢰사회와 비교할 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주장했다. 신뢰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사회적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CEO와 월마트의 인수ㆍ합병(M&A) 사례는 신뢰가 비용을 얼마나 줄여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 사례다. 2003년 5월 워런 버핏은 월마트의 자회사인 맥레인을 15억 달러(약 1조7000억원)에 인수했다. 이 정도 규모의 거래는 1년 정도의 시간과 많은 인적 자원이 투입되기 마련이다. 모른 종류의 서류를 검증하고 공인하기 위해 거액을 지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라서다. 그런데 두 회사의 계약은 2시간 동안의 회의와 악수로 성사됐다. 정밀 실사도 없이 29일 만에 거래를 마무리 지으면서 시간은 물론 막대한 비용을 절약했다. 높은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마윈 중국 알리바바 회장도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9월 알리바바가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될 때 “세계로부터의 높은 신뢰를 받을 수 있어서 기쁘다”며 “알리바바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정부ㆍ고객ㆍ주주로부터 신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신뢰가 주는 효율성은 개인 간 거래에도 적용된다. 뉴욕 한 노점상의 사례다. 한명이 운영하는 이 노점상은 아침마다 핫도그를 사기 위한 손님으로 가득하다. 손님이 만든 긴 줄 때문에 되돌아가는 이도 많았다. 핫도그를 만들고 포장해 손님에게 전달하고 잔돈을 바뀌어주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점상 주인은 ‘자율 잔돈 통’을 만들었다. 손님은 핫도그 값을 잔돈 통에 넣고, 잔돈 역시 스스로 계산해 가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손님을 두배나 더 빠르게 응대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신뢰 받고 있다고 느낀 손님들이 더 많은 팁(Tip)을 남기기도 했다.

신뢰 없으면 사회적 비용 늘어나

그렇다면 신뢰를 높일 수 방법은 무엇일까. 신뢰는 평등과 공정에서 나온다. 사람은 차별 받았다고 생각할 때 분통과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공정하게 이뤄진 절차와 경쟁에 의해 결과가 판가름 났다면 설사 손해를 봤더라도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필자가 생각하는 평등은 같은 상황이라면 누구에게든 공정한 기회를 주는 것이다. 노약자ㆍ어린이장애인, 혹은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마련해야 평등 사회라는 얘기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 평등하다고 자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같은 죄를 지어도 사회적 신분에 따라 죗값이 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이중의 잣대가 사회적 비용을 높인다는 것이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는 구호와 의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회 시스템과 제도 개선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우려되는 점은 우리 사회가 이미 ‘기회의 불평등’을 당연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수저 계급론’이 그것이다. 원래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것은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다는 관용적 표현이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은수저를 금수저로 바꾸고, 흙수저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냈다. 이런 흙수저라는 개념에는 평등사회가 구현되기 어려울 거라는 체념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일부에서는 ‘수저 계급론’을 이야기하는 젊은이를 나약하고 패배적이라 평한다. 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푸념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시가총액 상위 기업의 주인은 대부분 상속자다. 태어날 때부터 큰 특혜를 누리며 자란 사람들이 재벌 기업을 이끌고 있는 셈이다. 교육의 환경도 다르지 않다. 국내 명문대 입학생의 대부분이 서울 강남권 출신 학생이라는 통계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부 부유층과 언론은 고질병 같은 가난과 높은 실업률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시장을 키우자고 주장한다. 부자들이 부를 더 많이 축적하면 더 많은 소비를 해서 일자리가 늘어날 거라는 게 근거 논리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경기 상황에 따라 소수에게 집중된 부가 소비를 통해 사회 전체에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될 공산이 더 크다. 일례로 미국은 2006년 고소득층의 소득세율을 70%에서 35%로 낮추고, 기업의 법인세율도 인하했다. 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은 더 커졌고 재정 절벽과 국가 신용등급 강등이라는 수모를 겪었다.
▲ ‘흙수저’에는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이 녹아 있다.[사진=뉴시스]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부유층으로부터 세금을 걷어 저소득층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여기에 한가지를 더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부의 확산이다. 기부 문화는 소득 불균형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고소득층이 존경받을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준다.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매개체 역할도 능히 해낸다. 필자가 기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경제력의 차이를 줄인다고 사회 구성원의 신뢰가 구축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 약자를 부자로 만든다고 사회가 성숙해지는 게 아니다. 고소득층이든 저소득층이든 사회의 안전망 속에서 더불어 살 수 있어야 ‘신뢰사회’가 만들어진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구성원 간 신뢰가 쌓이면 강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조직원 사이에 신뢰가 없으면 서로 감시하고 참견하는 등 부가가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아울러 기업 경쟁력의 핵심인 창의적 사고와 혁신적 기술개발은 꿈도 못 꾸게 된다. 상급자든 동료든 후배든 감시와 참견만 하는데 창의적 사고가 발현될 수 있겠는가.

수저계급론의 심상찮은 경고

문제는 그런 신뢰를 어떻게 구축하느냐다. 답은 간단하다. 공정하면 된다. 불평등을 줄이면 된다. 인사와 평가가 학연ㆍ지연ㆍ아부 등에 좌우된다면 조직원은 분노하고 뿔뿔이 갈라질 것이다. 평가의 룰을 명확히 공개하고 합의한 후 공정하게 평가해야 기업과 구성원의 신뢰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해 냈다. 그러나 이런 경제 성장에도신뢰ㆍ소통ㆍ협력이라는 사회적 자본은 밑바닥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 영국 레가툼 연구소가 전세계 142개국을 대상으로 신뢰에 관한 사회자본 지수를 조사했다. 그 결과, 1위와 2위는 각각 노르웨이, 뉴질랜드가 차지했고 우리나라는 69위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2010년 UN개발계획에 따르면 한국의 소득성장 속도는 3위를 기록했지만 불평등 지수는 27위에 머물렀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사회 구성원이 신뢰로 똘똘 뭉쳐야 한다. 신뢰가 없는 양적 성장은 사회 갈등만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신뢰의 경제학’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우철 바른투자자문 대표 www.barunib.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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