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92

▲ 이순신은 큰 칼을 쓰고 금부나졸 수십명에 끌리어 정릉골 의정부로 압송됐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여러 현인이 이순신을 국문해선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조정은 이 의견을 듣지 않았다. 제1·2차 국문은 윤근수가 맡았다. 이순신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말이 안 되는 질문엔 아예 답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국문을 맡은 윤근수는 발을 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건장한 팔척 장신의 이순신은 큰 칼을 쓰고 금부나졸 수십명에게 끌리어 황토黃土마루를 지나 정릉貞陵골 의정부로 왔다. 길가에는 서울 백성들 수만명이 한산도에서 호랑이떼같이 무서운 일본군을 닥치는 대로 때려부순 이순신을 보기 위해 식전 아침부터 모여들었다. 충용장군 김덕령도 아무 죄 없이 몰아 죽이고 이번에는 더 공이 많은 이순신이 누명을 쓰고 죽는다고 하니 ‘조선은 소국이기에 위대한 인물은 용납을 못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간신의 무함이니 적국의 반간이니’ 하는 별별 말도 나돌았다. 형조좌랑 강항姜沆이 상소를 올렸다. “이순신은 바다의 장성長城인데 그 죄상이 아직 드러나지 아니하였거늘 갑자기 관리들의 의견에 따라 잡아들이고 원균으로 대임시킴은 불가합니다.” 강항의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수은睡隱이다. 적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에 들어갔다. 풍신수길이 학문적인 명성과 신망을 중히 하여 옆에 두려 했지만 강항은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인은 그를 옛날의 소무蘇武와 같다고 하였다.

강항이 귀국할 때에 마침 김섬金蟾과 배를 같이 타게 되었다. 김섬은 함흥 기녀로 천곡 송상현의 시첩이었다. 일본군이 동래를 함락할 때 천곡은 절사하였으나 김섬은 천곡이 죽은 줄 모르고 포로가 되어 바다를 건넜다. 풍신수길이 송상현의 측실이란 말을 듣고 예우하여 일본 부녀자의 훈도를 하게 하였다(수은일기 중 일부). 호조정랑 정경달도 상소를 올려 순신을 변호하였다.

▲ 장경달은 상소를 올려 “형세를 살피는 것도 싸움의 기술”이라며 이순신을 두둔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과 적을 막는 재주는 옛날에도 짝을 이룰 자가 없었습니다. 싸우지 않고 진중에 머물러 있는 것도 또 하나의 병법입니다. 어찌 기회를 보고 형세를 살피면서 방황하여 싸우지 않는다고 하여 죄가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 사람을 죽여 사직이 망하게 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한산도에 다녀온 위유사 황신 역시 한성에 도착해 조정에 진언하였다.

“악의를 내보내고 기겁騎劫이 대신함과 같으니(연나라가 악의 대신 기겁을 장수로 삼았다가 제나라에 70여성을 빼앗긴 것을 빗댄 말) 삼도의 장사들이 사이가 나빠질 것이요, 염파가 물러가고 조괄趙括이 오는 것과 같으니(조나라가 염파 대신 조괄을 기용했다가 장평 전투에서 대패한 것을 빗댄 말) 일국의 백성들은 이로부터 전쟁에 패배하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조정은 이런 현인들의 상소와 경고를 모두 불청하였다. 제1차 국문의 상황은 이러하였다. 윤근수는 이순신을 바라보며 “네가 나라의 은혜가 지중하거든 어찌 해서 두 마음을 품고 적장의 뇌물을 받고 가등청정을 잡지 않고 놓쳤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문하는 윤근수는 키가 중간 이하였지만 심문하는 음성은 웅장하였다. 연령으로 말하면 금년이 회갑인 정유생 61세의 노인인데 순신보다 8년 위였다. 순신은 이렇게 답했다.

순신 변호하는 상소 잇따라

“의신(자신을 낮춰 이르는 말)의 책무는 국가의 간성이 되는 데 있었으며 전란 이래 6년 동안 대소 100여번을 싸웠으나 지금까지 재략이 모자라 적을 섬멸하지 못한 죄는 1만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지만 적에게서 뇌물을 받고 적을 놓아 준 일은 없소!” 윤근수는 다시 따졌다. “너는 금부관원이 왕명을 받들고 너를 잡으러 내려갔을 때에도 거만하게 관원을 욕하고 사졸과 백성을 선동하여 왕명을 받든 금부관원에게 폭행을 가하도록 시켰다.

남삼도의 연로에서도 관원들에 대한 방해가 대단하였다한즉 네 죄를 네가 알겠지?” 하지만 순신은 가치 없는 질문에 변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첫날 국문은 이러한 말들로 그치고 말았다. 윤근수가 이순신의 무죄를 사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정에선 첫날 국문이 철저하지 못함을 공격하는 논쟁이 일어났다.

임금을 속이고 적장에게 매수가 되어 조국을 판 이순신의 죄를 엄히 물어 ‘장하杖下의 원혼’이 되게 만들라는 주장이 쏟아졌다. 윤근수는 이 일을 맡은 걸 후회하였다. 악비를 몰아 죽인 진회秦檜의 일을 생각하고 후세의 공론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퍽 영리하다. 첫날 국문에서 벌써 이순신이 위인라는 걸 간파하였다. 그 당당한 태도와 늠름한 기개는 윤근수뿐만 아니라 모든 관리에게 두려움을 줬다.

순신의 당당한 기세에 눌린 윤근수

이튿날 이순신의 제2차 국문이 개시됐다. 윤근수가 물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네게 청병할 때 너는 어찌 해서 출병하지 아니하여 원균이 고군으로 분전하다가 대패를 당하게 하였는가?” 순신은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오, 사실이 그렇지 않소. 그때는 원균이 이미 패전한 뒤였소. 더구나 관할하는 영역을 넘어 다른 도로 출전하기 위해선 왕명이 있어야 하오. 왕명을 받지 못하고 경상도로 경역을 넘어 출전하면 월경한 죄를 물어야 하오.”

순신의 대답을 들은 윤근수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앉았다가 다시 물었다. “옥포·당포 등지에서 원균의 공이 으뜸이거든 어찌해 너의 공인 것처럼 성상께 아뢰어 군부를 속였는가?” 이순신은 “갑의 공이니 을의 공이니 할 것 있소? 사직의 신령이 도우심이요, 삼도수군 제장이 역전한 공이며 만인이 본 바이니 세상에서 정평이 있을 것이오”라고 답했다.

윤근수는 또 이렇게 물었다. “한산도에서 궁궐 같은 제승당이니 운주각이니 하는 집을 짓고 밤낮 주색에 빠졌다는 죄에 관하여서도….” 그러자 이순신은 말이 너무 비루하여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기록관은 순신이 제 죄를 자인하여 대답이 없다는 것으로 적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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