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업계의 엇갈린 성적표

해운업이 장기불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출발한 ‘불황 회오리’ 탓이다. 특히 한진해운-현대상선의 부진은 심각하다. ‘강제 합병설’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중견 해운사들은 ‘실적 순항’을 하고 있다. 이들은 불황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답은 알짜경영에 있다.

▲ 글로벌 해운업계가 부진에 빠진 가운데 우리나라 중견 해운사들의 실적이 개선되고 있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해운업계의 침체기가 길어지고 있다. 한진해운ㆍ현대상선 빅2의 부진은 심각한 수준이다. 업계의 전통적 호황기인 지난 3분기에도 두 해운사는 적자를 냈다. 한진해운은 3분기 매출 1조9087억원, 영업이익 -57억4985만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현대상선의 매출은 1조4289억원, 영업이익은 -747억원이었다.

두 회사의 부진이 유난히 뼈아픈 이유는 ‘재무구조 개선 계획이 완료된 후’의 실적이라서다. 2013년 양사는 재무구조 개선 계획을 발표했다. 한진해운은 2조여원, 현대상선은 3조3000억원의 유동성을 확보하겠다고 밝혔고, 자구안 대부분을 충실히 이행했다. 한진해운은 자산매각, 사업부 축소 등을 통해 2조3000억원을 확보했다. 영구교환사채 발행을 통해서도 수천억원의 자금을 마련했다. 지금까지 자구안 달성률은 118%에 이른다.

현대상선도 현대로지스틱스, LNG선 매각, 전용선 및 해외터미널 분할 매각 등을 통해 자구안 108%를 달성했다. 결국 두 회사의 문제는 ‘팔 만한 것은 모두 팔았음에도’ 실적 부진의 늪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설說에 그치긴 했지만 업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진해운-현대상선 합병론’이 다시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운업계의 위기는 우리나라 해운사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세계 최대 해운사인 머스크는 최근 당초 계획한 대형선박 발주를 취소하고 인력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선사들이 활발한 인수ㆍ합병(M&A)을 하고 있는 것도 불황과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 CGM의 APL 인수 추진, 중국 양대 해운업체 코스코(COS CO)ㆍCSCL의 합병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모든 해운사가 ‘죽음의 바다’에 빠져 있다는 건 아니다.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해운사도 있다. 우리나라 중견 해운사들이다. 특히 SK해운의 성장은 눈여겨볼 만하다. SK해운은 올해 3분기 매출 5040억원, 영업이익 382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영업이익 64억원의 5배 이상이다. 영업이익률은 8.9%에 달한다.

KSS해운은 올해 3분기에 지난해보다 59% 늘어난 99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2010년 460억여원을 기록한 폴라리스쉬핑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1100억원대로 훌쩍 늘어났다. 한때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대한해운 역시 지난해 1분기부터 6분기 연속 흑자를 이어가고 있다. 고려해운은 19 54년 설립 이후 30년 연속 흑자를 내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1조2451억원, 영업이익은 사상 처음으로 600억원을 넘겼다. 이외에도 장금상선, 흥아해운 역시 지난해보다 영업이익이 증가했다.

작은 고추가 매운 이유

대형ㆍ중견 해운사의 실적이 엇갈린 이유는 무엇일까. 답을 찾기 위해선 먼저 해운업계의 위기가 촉발된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근의 해운업계 위기는 경기침체로 인한 ‘물동량 감소’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글로벌 경기가 악화되자 기업들이 운송량 자체를 줄였다는 얘기다. 단순히 물동량만 줄어든 게 아니다. 이 기간 머스크 등 대형 글로벌 해운사들은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선복량(적재능력)을 늘리고 운임을 인하했다. 해운업계의 ‘치킨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공급은 넘치는데 수요는 늘지 않아 장기불황에 빠지게 됐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 대형 해운사들은 선박 투자 타이밍을 놓쳤다. 해운업계는 어차피 사이클을 타는 업종. 선박 가격이 저렴한 불황기에 선박을 저렴하게 사뒀다가 호황기에 운송량을 늘리는 게 해운사의 투자 포인트다.

하지만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정부가 요구하는 부채비율 200%를 맞추기 위해 선박을 대규모로 팔았다. 당연히 2000년대 초반 호황기에 운송을 책임질 선박이 부족했고, 해운업체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비싸게 배를 주문했다. 그 결과, 두 회사의 재무구조는 취약해졌고, 지금의 대세인 ‘초대형 선박(1만8000TEUㆍ1TEU=20피트 컨테이너 1개)’은커녕 5년간 배를 한 척도 발주하지 못했다.

중견 해운사의 선택은 달랐다. 이들은 호황기에도 대규모 선박을 발주하지 않고 보수적인 경영 전략을 펼쳤다. 시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대의 경쟁력을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SK해운이 대표적이다. SK해운은 탱커선, 가스선, 벌크선, 벙커링 등 4개 사업 영역이 서로 비슷한 비중으로 구성돼 있다. 특정 사업이 부진해도 다른 사업이 메울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SK해운이 올해 벌크선박 부문에서 기록한 손실을 탱커 영업실적이 만회할 수 있었던 이유다.

시장을 흔들 수 있는 핵심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KSS해운은 가스, 화학제품 등 특수화물 운송에 특화돼 있다. 폴라리스쉬핑은 철광석을 주로 수송하고 대한해운은 원유, 철강, 석탄 등 원자재 수송에 강점이 있다.

불황기에 빛난 알짜경영

‘틈새시장’을 공략한 것도 주효했다. 무엇보다 선박 운임이 낮아 대형 선도사들의 관심 밖에 있던 아시아 노선에 집중한 게 알찬 열매로 이어졌다. 2008년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도 아시아 신흥국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수출입 물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 중견 해운사 관계자는 “해운업계의 불황이 예상보다 심화되고 있어 앞으로의 실적까지는 장담할 수 없다”면서도 “하지만 보수적인 경영전략을 펼쳐온 덕분에 대형 해운사들처럼 위기를 겪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중견 해운사의 ‘알짜 경영법’을 대형 해운사가 벤치마킹해야 하는 이유다. 때론 형보다 나은 아우도 있는 법이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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