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vs 2015년 한국경제, 덩치 커졌지만…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1997년 외환위기 때를 방불케 한다.” 과연 그럴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한국경제의 덩치는 당시보다 훨씬 커졌다. 외환보유액은 비교도 안 된다. 문제는 영업이익률의 추락과 신성장동력의 부재다. 그러니 기업들이 ‘사람을 잘라내’ 실적을 유지하려는 거다. 과연 이 구조조정이 만병통치약일까.

▲ 기업이 노동자를 잘라내는 진짜 이유는 영업이익률을 끌어올릴 만한 성장동력이 없어서다.[사진=아이클릭아트]
‘한국경제 위기론’이 온 나라를 덮고 있다. 한편에선 지금 상황을 IMF 외환위기 시절과 비교하기도 한다. 1994년 미국이 금리를 인상한 후 엔화 약세, 위안화 평가절하, 수출 감소, 기업부채 급증이 뒤따라오면서 경제 체력이 약해진 것처럼 이번에도 금리인상과 수출 감소, 가계부채 급증 등 위험 요소가 줄줄이 터지고 있어서다. 그렇다면 정말 지금이 IMF 외환위기 때보다 혹은 그때만큼 심각한 상황일까. 각종 수치들만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IMF 외환위기가 닥친 직후인 1998년과 현재를 비교해보자. 올해 경제성장률(실질 GDP 성장률) 전망치는 2.6%, 1998년엔 -5.5%였다. 실업률과 고용률(20~59세 기준)은 2015년 3분기 기준 각각 4.4%, 71.3%다. 1998년엔 각각 7.0%, 67.3%였다. 제조업 가동률지수(2010=100 기준)는 같은 기간 92.4, 1998년엔 84.1이었다. 제조업 부채비율은 지난해 기준 89.2%, 1998년엔 303.0%였다. 경상수지도 당시엔 적자였지만 2015년엔 112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외환보유액도 당시 332억 달러에서 현재(2015년 11월 기준) 3685억 달러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수치만 놓고 보면 IMF 외환위기 시절보다 지금이 좋지 않다고 말할 만한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이유는 뭘까. 언급한 사례에서 빠진 두개의 통계만으로 모든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기업의 생산지수, 다른 하나는 기업의 매출 대비 영업이익률이다. 1998년 당시 제조업 생산지수는 36.1, 영업이익률은 6.1%였다. 반면 2015년 10월 기준 제조업 생산지수는 106.9, 영업이익률은 4.2%(2014년 기준)다. 물건은 예전보다 훨씬 많이 만들어내고 있지만 팔아도 이윤이 남지 않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불황형 흑자’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일부 기업이 경영 여건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20대 명예퇴직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경제, 팔아도 남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만든 건 국내외 불안요소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경기 둔화, 저유가 국면,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인한 신흥국 경기 둔화가 한국경제를 괴롭히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저출산ㆍ고령화라는 구조적인 문제, 사상 최고치에 이른 가계부채, 기업의 성장동력 부재, 사회양극화, 내수 부진이 골치를 썩인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한국경제의 기초체력이 약했지만 외부충격도 강력했다. 이 때문에 외부충격이 가시면 충분히 회생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99년 경제성장률은 11.3%로 지난 20년을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제조업 영업이익률도 전년 대비 0.51%포인트 상승한 6.62%였다. 전년 대비 제조업 부채비율도 떨어졌고, 제조업 가동률은 늘었으며, 실업률은 줄었다.

▲ 정부는 젊은이들에게 창업을 강조하지만 미래가 불투명하고 고용이 불안한 상황에서 창업은 쉽지 않다.[사진=뉴시스]
반면에 최근의 위기는 당시와 완전히 다르다. 외부환경은 예측 가능하지만 충격이 오래 지속된다. 기업의 부채비율이 당시보다 훨씬 낮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초체력도 이전보다 튼튼하다. 문제는 기업의 영업이익률을 끌어올릴 만한 성장동력이 없고, 앞으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임진 금융연구원 거시경제 연구실장은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기업들이 문어발 경영에 나서는 등의 내부문제가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외부 충격이 더 컸다”면서 “지금은 두차례의 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대외 충격에는 내성耐性이 생겼지만 해결이 더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에 상황이 심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영하 한국엔젤투자협회 회장도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수출 중심의 산업구조를 버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이런 관점에서 할 수 있는 건 신성장동력을 찾는 것밖에 없다”면서 “그런데 지금 그게 완전히 막혀 있으니 이보다 심각한 상황이 어디 있겠나”라고 지적했다. 고 회장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창업이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성장동력이 사라진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우물 가서 숭늉 찾는 정부

그런데 참 역설적이다. 정부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양보해야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서 세대간 일자리 전쟁을 부추긴다. 그렇게 힘들게 들어간 기업에서는 10년도 지나지 않아 ‘명예퇴직’을 하라고 강요한다. 명퇴 후엔 자영업에 나서지만 이미 포화상태다. ‘신성장동력’을 외치며 골목까지 치고 들어오는 대기업 프랜차이즈에 밀려 쪽박을 차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젊은이들은 고용이 불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하니 죄다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공무원 시험을 치러 간다. 결혼과 육아에 신경 쓸 겨를은 없다. 당연히 창업은 꿈꾸기 힘들다.

혁신과 아이디어로 승부수를 거는 창업이 없으니 당연히 사회 전체에 혁신은 없다. 정부는 창조경제를 외치며 계속 창업을 부추긴다. 기업도 거든다. 그러면서 여전히 ‘경제가 어렵다’는 불평과 함께 노동개혁과 구조조정만을 외친다. 본질은 외면한 채 헛다리만 짚고 있는 셈이다. 지금의 한국경제, 정부와 대기업이 만든 자충수는 아닐까.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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