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립형 스마트폰, 삼성ㆍLG 지울까

당신은 용산전자상가에서 ‘조립형 PC’를 구입해 본 적 있는가. 만약 있다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와 ‘품질’에 만족했을 것이다. 언젠가 스마트폰 시장에도 이런 시대가 오지 않을까. 최적의 부품을 모아 스마트폰을 만드는 ‘조립형 시대’ 말이다. 여기 좋은 예가 있다. SK텔레콤의 전용단말기 ‘루나(LUNA)’다.

▲ SK텔레콤의 ‘루나(LUNA)’와 같은 OEM 스마트폰 수요 증가는 삼성전자 등 단말기 제조사에 위기일 수 있다.[사진=뉴시스]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스카이폰(SKY)을 처음 봤던 그 느낌이다.” 2015년 9월 출시한 SK텔레콤의 전용단말기 ‘루나(LUNA)’를 접한 소비자들의 평가다. 루나는 요즘 국내 스마트폰 시장에서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다. SK텔레콤에 따르면 현재 누적판매량은 12만대(12월 3일 기준)를 넘어섰다. 연말까지 누적판매량 15만대를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예상대로라면 루나는 프리미엄 단말기를 제외한 SK텔레콤의 중저가(출고가 50만원 미만) 전용단말기 가운데 최초로 출시 4개월 만에 누적판매량 15만대를 돌파하는 셈이다. 외산과 신규제조사 진입이 어려운 한국 스마트폰 시장의 특성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이다.

루나의 인기 비결은 뭘까. 대리점주들에 따르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좋다’는 거다. 일단 루나의 출고가격은 44만9900원으로 삼성이나 애플의 프리미엄 스마트폰의 절반 정도다. 최대 약 30만원(요금제에 따라 다름)의 공시지원금을 받으면 10만원대에 구입할 수 있다. 반면에 사양은 프리미엄급이다. 국내 출시된 안드로이드폰 가운데 최초로 알루미늄 유니바디(조립이 아닌 통째 케이스)를 적용했다. 5.5인치 풀HD 디스플레이와 전면 800만ㆍ후면 1300만 화소 카메라, 3GB 램(RAM) 등 프리미엄급 사양을 갖췄다.

눈여겨볼 점은 ‘가성비 좋은’ 루나를 누가 만들었냐는 거다. SK텔레콤과 TG앤컴퍼니(옛 삼보컴퓨터 계열)가 협업해 스펙을 만들고 폭스콘이 제조했다. 폭스콘은 세계 최대의 전자기기 주문자상표부착(OEM) 생산업체로 애플의 아이폰도 여기서 생산한다. 삼성전자 같은 스마트폰 제조사가 아니라 OEM으로 생산했다는 거다. 더구나 앞으로도 루나와 비슷한 제품은 더 나올 것으로 보인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전용단말기 출시는 판매 실패가 고스란히 실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소비자의 욕구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 번거로운 작업”이라면서 “그럼에도 이동통신사가 전용단말기를 내놓는 이유는 기존 제품에는 없는 가격ㆍ성능ㆍ디자인을 원하는 소비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존 제조사를 통해서는 루나 같은 제품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TG앤컴퍼니와 손을 잡게 됐다”면서 “향후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소비자들의 요구가 있다면 루나와 같은 단말기는 언제든지 더 나올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무슨 뜻일까. 첫째, 소비자 반응에 따라 이통사는 언제든 공급처를 다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 단말기 제조의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 평준화돼 있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스펙 좋고 저렴한 단말기를 공급받을 수 있다. 셋째, SK텔레콤 루나를 통해 반드시 제조사 브랜드를 단 단말기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팔린다는 게 확인됐다. 넷째, 소비자의 반응만 따라주면 루나와 같은 단말기는 언제든 나올 가능성이 있다. 삼성전자와 같은 전통적인 단말기 제조사의 입지가 좁아질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OEM 스마트폰 ‘루나’의 진격

한 유통업계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는 단말기 제조업체가 셀 수 없이 많다. 돈만 주면 스펙에 맞춰서 만들어준다. 컴퓨터의 CPU에 해당하는 모바일 AP는 퀄컴이나 애플에서, 디스플레이는 삼성이나 LG에서, 모바일용 카메라는 삼성전기와 LG이노텍에서, 반도체는 삼성과 SK에서, OS는 구글에서 가져와 조립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통사들이 제조사의 눈치를 보면서 제품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제조사에는 위협적일 수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PC시장이 브랜드 제조사 중심에서 조립형 PC 중심으로 옮겨간 것처럼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조립형 스마트폰’ 시대가 열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얘기다. 더구나 이미 2014년 4월 구글은 ‘프로젝트 아라(Project Ara)’ 개발자 콘퍼런스를 통해 조립형(모듈화) 스마트폰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올해 예정돼 있던 구글의 첫 조립형 스마트폰 출시 계획이 내부 사정에 의해 2016년으로 미뤄지긴 했지만 여전히 프로젝트는 진행 중이다.

그런 점에서 루나는 ‘조립형 스마트폰’ 시대로 가는 과도기 제품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루나의 판매량은 월평균 약 4만대가 고작이다. 세계를 무대로 2015년 3분기에만 8380만대의 스마트폰을 팔아치운 삼성전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판매량이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가 루나의 돌풍에 별 신경 쓰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루나에 대응할 만한 제품군이 있으니 크게 개의치 않는다”면서 말을 이었다. “삼성전자는 프리미엄 제품만 만드는 게 아니다. 중저가 제품까지 다양한 모델을 내놓고 있다. OEM을 통해 만들어낸 루나가 삼성전자의 입지를 흔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삼성전자의 경쟁력은 그렇게 호락호락 넘볼 수 없다. 루나를 조립형 스마트폰의 전조로 보는 건 무리한 설정이다. 더구나 조립형 스마트폰은 아직까지 개념만 있지, 실체도 없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루나와 같은 단말기가 브랜드보다 가성비로 소비자를 휘어잡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두가 유비쿼터스를 상상으로만 그리고 있던 2007년 애플의 아이폰은 유비쿼터스를 눈으로 보여주며 소비자를 휘어잡았다. 당시 휴대전화 시장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삼성전자는 아이폰을 따라잡기에 바빴다.

조립형 스마트폰, 허상일까

▲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사업은 2007년 애플 아이폰의 등장으로 크게 휘청거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게다가 조립형 스마트폰은 더 이상 개념만 있고 실체가 없는 허상도 아니다. 최근 네덜란드의 벤처기업 페어폰은 구글보다 먼저 조립형 스마트폰을 시장에 선보였다. 2015년 12월 21일 페어폰은 세계 최초의 조립형 스마트폰 ‘페어폰2’를 출시했다.

구글의 아라처럼 주요 부품은 모듈화돼 있다. 초보자도 배터리와 액정화면, 카메라, 프로세서 등을 모두 드라이버만으로 분리ㆍ교체할 수 있다. 부품 수요에 대응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가격변동성이나 조달변동성이 높은 광물의 사용도 최소화했다. 제품 업그레이드까지 가능하면 진짜 조립형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삼성의 휴대전화 사업은 위기를 맞고 있다. 프리미엄 시장은 이미 애플에 뺏겼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4년 말 중저가 갤럭시 출시를 선언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중저가 시장은 중국의 벽에 부딪히고 있다. 이젠 이통사의 OEM 스마트폰까지 등장했다. 그런데도 삼성전자는 느긋하다.

더 큰 문제는 아직까지 삼성전자를 이끌고 있는 핵심 사업이 여전히 휴대전화 사업(지난해 기준 매출액 대비 47.9%)이라는 점이다. 삼성전자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해법은 묘연하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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